책소개
이 책은 『장자』로 박사학위를 받고 40년 가까이 장자와 도가를 연구해온 명실상부한 국내 최고 전문가인 김갑수 교수가 펴내는 『장자』 완역으로 글항아리 동양고전 시리즈의 11번째 책이다. 이번 개정증보판에서는 한문 원문을 수록하고, 번역을 더욱 매끄럽게 전반에 걸쳐서 다듬었다. “이번 개정증보판에서도 전체적으로 수백 군데를 고치기도 하고, 하나의 문장이나 혹은 하나의 문단 전체를 다시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증보판이 아니라 ‘개정증보판’이라는 말을 쓴 것입니다”라고 역자는 말했다.
이 책이 의도하는 주요 독자는 학자가 아니라 일반인이며 가능한 한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말을 주된 번역어로 쓰고, 간단명료한 문체로 내용을 분명하게 전달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렇다고 원래 텍스트의 자구를 무시하거나 또 그것이 가지고 있는 의미에서 벗어나도록 허용한 것은 아니다. 텍스트에 충실하되 우리말의 어법에 맞아야 한다는 원칙을 일관되게 적용했다. 『장자』는 문장 자체도 해독이 까다롭고 때로는 진짜 무슨 의도로 썼는지 아무도 모르는 부분도 꽤 있다. 게다가 그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 역시 보통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곳이 많다.
그래서인지 우리말 번역서 가운데 아무리 읽어도 도대체 무슨 뜻인지 말이 안 되는 문장이 자주 있다. 특정 문장이 우리말 어법에 전혀 안 맞거나,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불분명하거나, 문맥이 전혀 통하지 않거나 하는 치명적인 문제들이 대부분의 번역서에서 발견된다. 물론 이 책도 그러한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확신은 못하지만 먼저 우리말이 되게 하고, 하나하나의 문장이 전체 문맥의 흐름에 맞아서 그 문단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 충분히 알 수 있도록 하는 데 가장 중점을 두었다. 물론 그것은 『장자』의 원문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도 안에서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고 역자는 계속 강조한다.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번역이라 원문과 어려운 글자나 어구에 대한 풀이를 상세하게 곁들이지 않았고, 이런 학술적 내막은 차후에 전문 역주서를 통한 학술번역을 통해 해소할 생각이다.
목차
개정증보판을 펴내며
머리말
해제
1. 장자의 전기
2. 『장자』의 성립
3. 장자의 사상과 지향
4. 『장자』에 나오는 주요 개념
제1부 내편內篇
제1편 소요유逍遙遊
제2편 제물론齊物論
제3편 양생주養生主
제4편 인간세人間世
제5편 덕충부德充符
제6편 대종사大宗師
제7편 응제왕應帝王
제2부 외편外篇
제8편 병무騈拇
제9편 마제馬蹄
제10편 거협??
제11편 재유在宥
제12편 천지天地
제13편 천도天道
제14편 천운天運
제15편 각의刻意
제16편 선성繕性
제17편 추수秋水
제18편 지락至樂
제19편 달생達生
제20편 산목山木
제21편 전자방田子方
제22편 지북유知北遊
제3부 잡편雜篇
제23편 경상초庚桑楚
제24편 서무귀徐無鬼
제25편 칙양則陽
제26편 외물外物
제27편 우언寓言
제28편 양왕讓王
제29편 도척盜?
제30편 설검說劍
제31편 어부漁父
제32편 열어구列禦寇
제33편 천하天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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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장주
출판사리뷰
『장자』에 나오는 주요 개념
장자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핵심이 되는 몇 가지 개념을 간결하게 정리해둔다. 이 몇 가지 개념만 분명히 해두어도 『장자』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도道
도는 대개 진리라는 개념으로 이해된다. 『장자』에서 말하는 도를 진리라는 말로 이해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진리라는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도는 장자를 포함한 도가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학파에서도 가장 중요하거나 혹은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도道라는 글자는 길을 뜻한다. 사자나 노루 등 동물이 다니는 길, 사람이 다니는 길, 바람이나 물이 다니는 길, 수레나 배가 다니는 길, 해나 달이 다니는 길 등 도는 무언가가 다니는 길을 가리키는 글자다. 모든 것은 정해진 길로 다니지만, 그 길은 다 다르고, 각기 제 갈 길이 있다. “모든 길은 하나로 통한다[道通爲一]”는 명제에서 보면 이런 모든 길을 포괄하는 길, 그것이 도가에서 강조하는 도다. 즉 모든 길을 하나로 통합하는, 차원이 다른 그 길을 도라고 한다. 그런 점을 강조하여 대도大道, 즉 큰 도라고 부르기도 한다. 요즘 우리가 사용하는 개념으로 바꿔보면 도는 바로 자연의 질서다. 도 자체가 자연의 질서를 뜻하는 말이지만, 그것을 특별히 강조하기 위해서 천도天道라는 말을 사용하며, 그와는 반대로 인간사회의 질서를 인도人道라고 말한다. 『장자』에서 사용하고 있는 도라는 말은 단순히 자연의 질서만을 뜻하는 개념이 아니라 때로는 모든 존재의 원천이며 모든 변화의 원인자라는 의미까지 포괄하는 개념이다.
도의 개념을 자연의 질서라는 뜻으로만 한정한다고 해도 인간은 그것을 결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장자에 따르면 시간과 공간은 무한하고 따라서 자연의 질서 역시 무한하지만, 개인은 물론 인류 자체가 유한하기 때문이다.
자연의 질서 혹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며 모든 변화의 원인자라고 할 수 있는 도를 우리의 지적인 능력으로 알 수는 없지만, 우리는 그것을 얻거나[得道] 터득할 수 있다[體道]. 도를 얻었다거나 도를 터득했다는 말은 우리가 어떤 물건을 손에 넣었다거나 새로운 규칙을 익혔다는 것과는 다르다. 득도나 체도는 도의 상태가 되었다는 뜻이다. 즉 우리의 정신과 몸의 기능이 타고난 자연 상태를 회복했다는 의미다.
천天과 인人
『장자』뿐만 아니라 중국 고대에서 천天이라는 글자는 하늘, 자연, 천부적인 것, 자연적인 것 등을 나타내고, 인人이라는 글자는 사람, 후천적인 것, 사회, 인륜, 인위적인 것 등을 나타낸다. 장자는 천과 인, 즉 자연과 인간, 자연적인 것과 인위적인 것을 엄격하게 구분한다. 유가에서는 천을 도덕적 근원으로 삼고, 그 도덕을 사회 질서의 바탕으로 삼는다. 즉 유가에서 주장하는 봉건적 윤리도덕이나 사회제도는 모두 천에 근거한 것이고 따라서 그것은 영원불변의 것이다. 노자나 장자는 이것을 비판한다. 모든 도덕적 규범, 모든 사회 제도 등은 결코 천, 즉 자연이나 내재된 자연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본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사회 규범이나 제도 등은 모두 우리가 필요에 의해서 만든 것이고 따라서 얼마든지 변하거나 없앨 수 있다는 것이 도가의 기본적인 인식이다.
유가와 마찬가지로 장자 역시 천인합일을 주장한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내용은 다르다. 유가에서는 사회적 규범이나 도덕은 인간의 천부적인 것 중에서 가장 빼어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완전히 구현하는 것이 바로 천인합일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장자는 그것과 상반되는 주장을 펼친다. 유가에서 주장하는 여러 가지 규범이나 도덕은 모두 후천적인 것이고 인위적인 것이며, 나아가 그것은 인간의 자연적 본성을 왜곡하고 어지럽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태어나서 알게 모르게 익혀온 여러 가지 규범이나 도덕이나 상식 등과 같은 것들을 몽땅 씻어내버려야 비로소 우리는 자연 그대로의 상태를 회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이 바로 장자가 지향하는 천인합일이라고 할 수 있다.
덕德과 성性
덕과 성은 모두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나 사물의 자연성을 가리킨다. 덕과 성은 자연의 질서로서의 도가 사람이나 사물에 내재된 것이다. 덕이나 성은 선도 악도 아니다. 장자는 그것을 선이라든가 혹은 악이라고 규정하는 것 자체가 인간의 본성을 왜곡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덕은 앞에서 설명한 도와 한 쌍이 되어 도덕道德이라고 쓰기도 한다. 도덕은 자연 그대로의 상태를 말하고, 사람에게서는 자연과 인간의 일치, 천인합일의 경지를 뜻한다. 천인합일이라고 해서 거창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 그대로의 상태, 갓 태어난 어린아이와 같이 순진무구한 정신의 상태를 가리킨다. 덕은 이처럼 타고난 원래의 순진무구한 정신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지만, 그것을 특히 강조하여 지덕至德이라고도 하고 그런 경지나 상태에 있는 사람을 지인至人, 진인眞人, 신인神人 혹은 성인聖人이라고 한다.
무위無爲와 자연自然
무위無爲나 자연自然은 모두 자연[天]의 작용을 형용하는 말이다. 무위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고, 자연은 저절로 그렇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안 한다는 의미의 무위는 가만히 있는 것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의식적으로 혹은 어떤 의도나 목적을 가지고 행위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아무런 의식이나 의도가 없는 행위는 다른 말로 저절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위와 자연은 거의 같은 의미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자연의 운동을 무의식적이고 무목적적인 작용이라고 규정할 수 있고, 자연의 그러한 작용과 마찬가지로 의도된 목적이나 의식 없이 행위하거나 살아가는 것을 인간에게 적용할 때 그것이 바로 무위다.
소요유逍遙遊
소요逍遙는 별다른 목적 없이 이리저리 어슬렁거린다는 뜻이고, 遊는 역시 목적 없이 그냥 논다는 뜻이다. 소요유는 별다른 목적 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이리저리 서성이면서 자유롭게 노니는 것을 말한다. 장자는 이런 소요유하는 삶, 애써 무언가를 추구하거나 이루려고 하지 않고 또 다른 사람을 간섭하거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간섭받지 않는 삶을 꿈꿨다. 그저 할 일 없이 빈둥대기도 하고 뒹굴기도 하는 그런 삶을 가장 이상적인 삶으로 보았고, 그것이 바로 장자가 말하는 소요유다. 장자의 친구 혜시가 장자의 학설을 크기만 했지 쓸모가 없는 나무에 비유하면서 비꼬자 장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런데 자네는 큰 나무를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이 쓸데없다고만 탓하는군. 자네는 왜 그것을 아무것도 없는 마을의 텅 빈 들판에 심어놓고, 그 곁을 아무것도 안 하면서 그저 왔다 갔다 하거나 그 아래 누워 뒹굴거리거나 하지 않는가? 그렇게 하면 도끼날에 찍혀 일찍 베어지는 일도 없고, 아무도 해를 끼치려 하지 않을 텐데, 쓸모없음이 무슨 근심거리가 되겠나?” 소요유라는 말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소요유의 유遊 자를 우리는 놀다의 뜻으로만 풀이하는데, 즐겁게 노는 것, 그 어떤 것에도 속박당하지 않고 노는 것을 말한다. 「응제왕」 편에 “유심어담遊心於淡”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마음을 담담하게 풀어놓는 것”을 뜻한다. 소요유도 역시 마음을 담담하게 풀어놓고 무심하게 지내는 것을 말한다.
심재心齋와 좌망坐忘
장자 수양론을 대표하는 말. 심신을 고요한 상태로 유지하여 결국 자신의 존재마저 잊어버리는 경지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경지에 도달한 상태를 상아喪我, 망기忘己, 무기無己 등이라고 하는데, 이는 자신과 대상을 구별하지 않는 흐리멍덩한 정신상태를 가리킨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물아일체라는 것은 바로 이처럼 자신과 대상에 대한 구별을 없애버린 정신상태 혹은 심리상태를 가리킨다.
절성기지絶聖棄智
문명을 버리고 인위로부터 벗어날 것을 주장하는 말. 중국 고대에는 불의 사용, 어로나 수렵, 농경법, 문자, 생활 도구 등과 여러 가지 윤리도덕에서부터 사회 규범과 제도 및 법률 등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문명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은 성인에 의해 발명되고 제정되었으며, 그에 대한 지식 역시 성인에 의한 것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성인과 지식을 끊어버리라는 말은 바로 문명을 버리고, 문명 이전의 자연 상태로 돌아가자는 것을 의미한다.
지덕지세至德之世
장자의 이상사회를 가리키는 말. 구체적으로 말하면 원시적 자연공동체와 같은 형태의 사회를 말하며 그 중요한 특징은 최소한의 도구만 사용하고, 경제적으로 자급자족하며, 지배나 피지배 혹은 가진 자와 못가진 자 등 어떤 사회적 차별도 존재하지 않는 사회다. 건덕지국建德之國, 유소씨지민有巢氏之民, 지생지민知生之民, 수인씨지민燧人氏之民, 신농지세神農之世 등도 역시 이상사회 혹은 이상적인 사회를 사는 인민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들 용어의 공통점은 모두 인류가 문명사회로 들어서기 이전의 세상이나 그런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을 나타내고 있다. 앞에서 지덕至德은 순진무구한 정신 상태를 강조한 말이라고 설명했다. 모든 사회구성원이 바로 순진무구한 정신상태를 가진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 아직 문명에 물들지 않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를 장자는 이상적인 사회로 보았고 그래서 그것을 지덕지세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