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택민澤民’, ‘합리적 인간 질서의 재수립’이라는 역사적 임무를 걸머진
중국의 전통적 지식인 이학파 사대부들이 관료 집단 및 황제와 벌이는 힘의 상호작용
내성외왕의 실현, 천하무도를 천하유도로 바꾸려는 움직임이
가장 활발했던 12세기 마지막 사반세기의 중국 정치문화사
『주희의 역사세계』는 현대 신유학을 대표하는 학자 위잉스가 2004년에 완성한 송대 정치문화사 연구의 금자탑이다. 송대 정치문화 구조 형태를 문화·정치의 주체였던 사대부의 정치활동을 중심으로 파악한 상편과, 주희의 시대에 이학파 사대부들과 관료 집단 사이의 복잡한 정치공학 관계를 서술한 하편은 총 1400페이지(한국어판)가 넘는 대작이다. 논쟁만으로도 책 한 권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 ‘21세기 가장 논쟁적인’ 동양 정치문화사 역작이다.
저자는 사서四書와 『주역』 등의 경전, 『송사宋史』 『실록』 등의 역사 기록물, 『주자문집』 『주자어류』 『근사록』 등의 주희 관련 문헌, 각 이학자들이 올린 「봉사封事」 「주차奏箚」 「주장奏狀」 「사면辭免」 등의 상소문류, 각 이학자의 문집과 연보, 일기류뿐만 아니라, 책에서 자료로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학자들이 주고받은 편지까지 온갖 자료를 그야말로 총망라하여 다루고 있다.
기존의 자료뿐 아니라 저자 위잉스 자신이 (때로는 생각지도 않게) 발굴해낸 사료에 의문을 던지고 그 의문을 풀어주거나 자신의 가설을 검증해주는 자료를 또다시 찾아내 자신의 입론을 확실히 하는 그의 학문적 태도와 방법은 가히 놀라울 따름이다. 여기에 더해 거시적 시각과 미시적 시각, 근인近因과 원인遠因, 언어의 영역과 사건의 영역, 선택과 집중, 분석과 통합을 아우르는 그의 학문 솜씨는 “송대 정치사 연구의 신기원을 열어젖힌 전조”(히라다 시게키平田茂樹 오사카시립대학원 교수)라는 찬사를 받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송대 사대부의 정치문화 연구’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이 책은 문화사와 정치사 간 상호작용을 본격적으로 다룬다. 여기서 주희는 송대 유학의 전체 동향과 사대부 정치문화 간 상호 영향을 연구하는 데서 선대를 계승하고 후대를 열어주는 축심의 위치에 있다. 책은 송대 신유학을 중심으로 삼는 문화적 발전과, 개혁을 기본 경향으로 삼는 사대부들의 정치적 동태 둘 다에 초점을 맞춘다. 이학자들은 내성지학內聖之學’과 ‘형이상학적 문제’에만 관심을 기울였고 현실 정치에는 모호한 태도를 취했다고 해석하는 것이 사학계의 굳어진 상식이다. 이 책은 이러한 편면적 관점 때문에 그동안 도외시되어온 유가(이학파) 사대부들의 정치적 이상과 실천의 역동적인 다면성을 다룬다는 데서 기존의 연구서들과 다른 확실한 변별점과 미덕을 갖는다.
목차
_상권
서문
자서 1 자서 2
서설
1. ‘정치문화’ 해석 2. 도학, 도통, 그리고 ‘정치문화’
3. 고문운동, 신학, 그리고 도학의 형성
4. 도학자의 ‘불교 배척’과 송대 불교의 새로운 동향
5. 이학과 ‘정치문화’
제1장│‘삼대’로 돌아가자-송대 정치문화의 시작
제2장│송대 ‘사’의 정치적 위치
제3장│“함께 천하를 다스린다”-정치적 주체의식의 현현
제4장│군주권력과 재상권력의 사이-이상과 권력의 상호작용
제5장│‘국시’ 고찰 _361
1. 북송 편 2. 남송 편
제6장│질서의 재수립-송 초 유학의 특징 및 그 계승
제7장│당쟁과 사대부의 분화
1. 이끄는 글 2. ‘국시’ 법제화하에서 형성된 당쟁의 새로운 형태
3. 주희 시대의 당쟁 4. 왕회의 집정과 당쟁의 관계 5. 남은 논의
주
찾아보기
_하권
서설
제8장│이학자와 정치적 경향
1. ’내성’과 ‘외왕’의 긴장 2. ‘내성’에서 ‘외왕’으로
3. “군주를 얻어 도를 행한다”-주희와 육구연 4. “군주를 얻어 도를 행한다”-장식과 여조겸
5. 남은 논의
제9장│권력세계 속의 이학자
1. 서언
2. 육구연의 축출 3. 유청지의 ‘도학 자부’ 사건
4. 왕회의 재상 파면 과정 5. 주필대와 이학자
제10장│효종과 이학자
1. 서언
2. 효종 만년의 인사 배치 1-주필대, 유정, 조여우라는 세 재상
3. 효종 만년의 인사 배치 2-이학형 사대부의 발탁
4. 이학자 집단의 배치-대간의 재정비와 인재 추천
제11장│관료 집단의 기원과 전승
1. 서언 2. 기원: 진가의 ‘위학 금지’로부터
3. 관료 집단의 전승 4. 광종대의 관료 집단
5. 유덕수의 자서 6. 강특립-관료 집단과 황권
7. 결론
제12장│황권과 황극
1. 효종의 3부곡: ‘삼년상’ ‘태자의 국무 참여’ ‘내선’
2. 개설: 역사학과 심리 분석의 상호작용 3. 입궁에서 수선으로-효종의 심리적 여로
4. 정체성 위기와 심리적 좌절 5. 효종 ‘말년의 정치’와 그의 심리적 차원
6. “착해지라고 질책하면 사이가 멀어진다”-효종과 광종의 심리적 충돌
7. ‘황극’을 둘러싼 논쟁
8. 결론을 대신하여: 세 가지 관찰
부록 : 부가 논의 세 편
1. ‘추출’ ‘전환’, 그리고 ‘내성외왕’-류수셴 선생에게 답함
2. 나는 주희의 가치세계를 훼손했는가--양루빈 선생에게 답함
3. 유가의 전체 계획에 대한 시론-류수셴 선생의 「회답」을 읽고서
주
옮긴이의 글
찾아보기
저자
위잉스
출판사리뷰
“세상 경영과 구제經濟는 일찍이 지향했던바, 은거하여 숨음은 평소 바람이 아니었네.”
“천하를 나의 임무로 삼는다以天下爲己任” ― ‘정치적 인간’ 혹은 ‘호모 폴리티쿠스’ 주희
이 책의 시간적 범위는 11, 12세기다. ‘주희(1130∼1200)의 역사세계’는 유학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여서 그 2세기 동안 일어난 유학의 변화가 책의 핵심 줄기를 이룬다. 하지만 이 책은 학술사나 사상사의 내적 연구가 아니며, 그 초점을 정치·문화·사회 각 분야와 유학 사이의 실제 관련성 및 상호작용에 두고 있다.
주희는 송대 사대부를 대표하는 전형이다. 주희는 학문과 정치를 함께 한 사대부였고 이는 양송(북송과 남송) 사대부들이 대체로 그러했다. ‘송대 사대부의 정치문화political culture’는 정치적 사유 방식과 정치적 행동 방식을 가리킨다. 정치적 사유 측면에서, 송대 사대부는 처음부터 합리적 인간 질서(당시 말로는 ‘하·은·주 삼대의 통치’)를 수립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정치적 행동 방식 측면에서, 송대 사대부는 “천하를 나의 임무로 삼는다” “군주를 얻어 도를 행한다” “황제는 사대부와 더불어 천하를 함께 다스려야 한다” “천하의 안위는 재상에게 달려 있다”고 인식했다. 송대 사대부들은 이러한 정치적 이상에 따라 스스로를 정치적 주체로 자부했고 정치 공간에 뛰어들어 민民에게 은택을 베풀려는 ‘택민’의 중임을 실천하려 했다.
이 책의 저자인 위잉스는, 대표적 이학자 주희와 육구연이 유학에 끼친 불후의 공헌이 ‘내성’ 측면에 있다 할지라도, 그들이 자나 깨나 생각한 것은 ‘외왕’의 실현이었다고 본다. 주희에게 “세상 경영과 구제는 일찍이 지향했던 바”이고 “은거하여 숨음은 평소 바람이 아니었”다.(주희의 시 「감회感懷」) 이러한 이유로 저자는 주희의 이학 체계를 정치적으로 독해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렇다면 주희가 ‘내성’을 관통할 뿐 ‘외왕’에는 냉담한 태도를 유지했다는 기존의 견해와 주희의 역사적 면모는 전면적으로 수정되지 않을 수 없다고 강조한다. 주희의 정치적 행동에 입각해서 말한다면, “군주를 얻어 도를 행한다”는 것이 시종일관 주희의 행동에서 보이는 뚜렷한 특색이었고, 이는 주희의 정식 정치활동이 시작된 효종 시기뿐 아니라 이후 광종과 영종 시기에도 내내 그러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 책은 송대 유학의 전체적인 동향이 ‘질서의 재수립’이고, ‘치도治道(정치 질서)’가 그 시발점이라고 판단한다. 이학은 ‘내성’을 그 분명한 특색으로 삼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성현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 인간 질서를 재수립하는 데, 선진 유학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바로 ‘천하무도天下無道’를 ‘천하유도天下有道’로 바꾸는 데 있었다.
“천하가 걱정하기에 앞서 걱정하고, 천하가 즐거워하고 나서 즐거워한다”
역사적 변동기에 송대 지식인들이 보여준 고도의 공적·사회적 책임의식
그렇다면 사대부 계층이 송대에서 높은 정치적 지위를 차지한 이유는 뭘까? 송대는 당 말부터 시작된 장기적 사회변동으로 변화된 사회구조에 직면했고 이에 따라 새로운 제도를 설계하여 유가적 질서를 세워야 했다. 황제는 민심에 순응하기 위해 문치 질서를 확립하려 했고, 그러기 위해 “천하를 나의 임무로 삼은” 사 계층에 도움을 청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대부들 역시 국가에 대한 이질시에서 동일시로 나아가면서 일종의 ‘시민’ 의식을 통해 국가와 사회의 공무를 처리하는 데 직접 참여하는 정치적 주체의식의 현현(곧 ‘외왕’)을 실현하려 했다. “굉장하구나! 신종은 [천하에] 뜻을 품었고 공[왕안석]은 군주를 얻었도다”라는 주희의 말이 이를 잘 설명해준다
“천하를 나의 임무로 삼는 것”은 송대 ‘사’들의 집단의식이었지 특별히 이상이 높은 극소수 사대부만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다시 주희가 지적하듯, “천하가 걱정하기에 앞서 걱정하고, 천하가 즐거워하고 나서 즐거워한다”는 범중엄의 명언이 사대부의 좌우명이었기 때문이다. “천하를 나의 임무로 삼는다”라는 집단의식은 현대의 용어로 말하자면 사대부의 정치적 주체 의식이다. 그들은 “권력의 근원이 군주에게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전혀 주저하지 않고 “천하를 다스리는” 대임이 자신들의 어깨 위에 놓여 있다고 분명히 여겼다.
여기서 반드시 지적해야 할 점은 “함께 천하를 다스린다”를 적극적으로 제창한 이들은 송대 사대부이지 황권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질서 재수립에 대한 송대 유학의 요구는 곧 송대 사대부라는 당시 지식인들이 현실세계에서 보여준 고도의 공적·사회적 책임의식으로 나타났다.
“좋은 사람 한 명을 재상으로 등용하면 현자들은 자연스럽게 줄지어 나온다.”
‘무위’로서 다스리는 입헌군주를 지향한 사대부 ― 서양 근대의 ‘시민’에 상응하는 정치적 주체
진한 이래의 “군주는 존귀하고 신하는 비천하다”는 것을 타파하는 일이야말로 송대 사대부들이 시종일관 추구한 목표였다. 그들은 이런 의식으로 무장하고 정치 공간에 뛰어들었으며, 더 나아가 자신들이 군주와 “함께 천하를 다스려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러한 새로운 정치문화 속에서 ‘군주’의 성격과 직권, 군주와 신민 간 관계는 치열한 논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군주는 최후의 권원權源(ultimate power)을 장악하여 결국 어떤 행동이든 할 수 있기 마련이어서, 주희는 ‘황극黃極(군주의 도)’을 논하면서 군주는 ‘순후한 덕’으로써 천하(민民)의 표준이 되기만 하면 된다고 했으며, ‘치도’를 논하면서는 군주의 기능을 ‘좋은 재상 한 명을 등용하는 것’으로 한정하고자 했다. 바꿔 말하면, 주희의 이상 속 군주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다스리는無爲而治” 입헌군주인 허군虛君이었다. 이는 군주의 절대 권력에 정신적 구속을 가하는 것으로 주희뿐 아니라 정이·육구연 등 이학자들의 상식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이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다스린다”는 관념을 통해 지향한 바는 사실 일종의 ‘입헌제도’ 수립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위잉스가 송대 체제를 입헌군주제의 맹아적 형태에 가까운 것으로 바라보려 함을 읽을 수 있다. 이때 송대 사대부들을 서양 근대의 ‘시민’에 상응하는 정치적 주체로까지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생긴다. 아무리 송대 사대부가 정치적 주체로서 서양의 ‘시민’과 유사하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귀족적 지배계층이었기 때문에, 결국 송대 체계는 입헌군주제적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것이 아닌가? 이에 대해 저자는 송대 사대부 곧 사士는 당대唐代 문벌 귀족과는 달리 세습적 계층이 아니었고, 그 지위로 볼 때 농農·공工·상商과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었음을 실증한다. 송대 ‘사’들은 사민四民 중 맨 위에 위치했을 뿐 기본적으로 ‘민’의 구성 요소였으며, 송대에는 농·공·상 계층에서도 과거시험을 통해 사가 배출될 수 있었음을 여러 증거를 들어 밝힌다.(당대의 세습적 문벌제도는 송대 초기에 이르러 이미 해체된다.)
“황제는 반드시 사대부들과 더불어 공동으로 국시를 정한다共定國是”
‘나라國가 올바르다고是 여기는’ 국시의 법제화 ― 주희의 역사세계를 이해하는 필수 조건
관념으로서의 ‘국시’는 옛날에 기원을 두는데 송대 이후에도 계속 존재했으며 오늘날까지도 유행하고 있다. ‘통치권의 방향’ 또는 ‘최고의 정치강령’ ‘정확한 국가 노선’이라 할 수 있는 국시는 송대에서는 법제화된 관념이어서 제도적 구속력을 가지며 권력 구조를 이루는 구성 요소가 되었다. 오늘날의 헌법에 상응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 ‘국시’의 법제화는 송대 정치사에 출현한 공전절후의 새로운 현상이다.
“공동으로 국시를 정한다”는 “함께 천하를 다스린다”는 주장과 함께 희령변법熙寧變法 시기(신종―왕안석)에 출현한다. ‘국시’는 황제와 사대부가 정한 ‘최고의 국책’인 만큼 당연히 ‘이론異論’들은 취해질 수 없었고, 황제와 사대부들은 그것에 구속될 수밖에 없었다. 곧 ‘국시’의 법제화 이후 황제든 집정대신이든 ‘이미 정해진 국시’를 공공연히 위배하는 행동을 할 수 없었다. 이 점에서 ‘국시’는 군주권력과 재상권력에 합법성을 제공했다. 이후 국시는 가장 먼저 계승되어야 할 유산으로 여겨지며 남송 말기에 이르기까지 시종일관 당쟁, 당금黨禁, 위학僞學 등 주요 정치적 사건과 긴밀히 얽히게 된다. 국시는 황제와 결국은 ‘어느 일파’의 사대부가 정한 것이기 때문에, 이후 각 파 사대부들은 ‘국시’를 둘러싸고 서로 충돌하며 붕당으로 분화하게 된다. ‘이론’으로 ‘국시’가 변경된다면 재상은 공동으로 정한 국시에 책임을 져야 해서 ‘국시’와 더불어 자신의 진퇴를 정해야 했으며, 황제의 정치 생명 역시 ‘국시’와 한 몸을 이루고 있었다.(고종이 효종에게 자리를 물려준 것은 당시 ‘국시’의 위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국시’(그리고 ‘국시’로 인한 당쟁)가 주희의 일생에 끼친 영향은 오래고 막대한 것이다. 주희의 부친 주송은 “국시가 이미 정해진” 상황에서 ‘이론’을 펼쳐 지방으로 좌천되었고(고종 시기, 1040), 주희 또한 ‘국시’ 관념이 일으킨 논쟁으로 정주이학程朱理學이 ‘위학’으로 금지되고 그와 여러 이학자 59명이 금고禁錮에 처해진 당금黨禁(경원의 당금)에 의해 정치 생명이 끝나버린다(영종 시기, 1196). 저자는 “국시를 고찰하지 않으면 주희의 역사세계를 철저히 인식할 방도가 없다고 해도 전혀 과장이 아니다”라며 “이 중요한 정치 현상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사람은 내가 아는 한 아직 없다”고 말하고 있다.
“주필대에게 무슨 당이 있는가? 오히려 왕당王黨[왕회의 당]이 지나치게 많을 뿐이다!”
800년 동안 묻혀 있던 ‘잃어버린 연결 고리’의 회복 ― ‘경원당금’ 비밀의 문이 열리다
책 하편 마지막 세 장은 남송 정치사의 중기 특히 효종(1162∼1189 재위), 광종(1189∼1194 재위), 영종(1194∼1224 재위)의 세 황제 시대를 다루는데, 이 시기는 800년 세월 동안 먼지 속에 파묻혀 있었다. 이 ‘잃어버린 연결 고리’ 시기는 효종·광종·영종 세 시대와 주희 시대의 정치적 조류 및 당쟁을 관통할 뿐만 아니라 다양한 이학자 집단과 개인의 정치적 행동과 긴밀히 관련된다.
저자는 주희 시대 정치사의 ‘잃어버린 연결고리’를 처음으로 온전히 복원해낸다. 효종은 대개혁을 추진하며 이학파 사대부와 동맹해 이후 십 몇 년간 지속된 정치적 파란을 일으켰고, 그 유명한 경원당금慶元黨禁(정주이학 통제령)이 최후의 결말이었다. 그런데 개혁 정책이 채 실시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정국이 바뀌어 효종의 최후 정책과 이학파 사대부의 정치적 활동은 정부(조정) 문서에서 분명한 기록으로 남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효종의 개혁은 역사상 희령변법과 같은 정식 명칭을 얻지 못했고 마침내 ‘잃어버린 고리’가 돼버렸다. 이 ‘잃어버린 연결 고리’ 때문에 주희가 말년에 왜 당금의 고난(그의 학문이 위학으로 전락하고 자신 또한 조정에서 축출되는 상황)을 당했는지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 결과 경원당금도 역사적 희극으로 전락해버렸다.
저자는 경원당금이라는 비밀의 문을 밀어서 잠금해제하여 읽어버린 역사적 연결 고리를 이으려는 개척자적인 시도를 한다. “주희 시대의 역사적 세계를 깊이 연구하기로, 1차 사료로부터 일체의 관련 증거를 체계적이며 전면적으로 찾아보기로,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12세기 마지막 20∼30년의 문화사와 정치사를 재구성하기로 마음먹었다.” 저자는 이 ‘잃어버린 고리’를 복원하기 위해 ‘황권皇權’ 영역에 뛰어든다. 이 시기 황권의 최대 특색은 황권이 두 중심으로 분열되었다는 점이다. 곧 효종(퇴위 후의 ‘태상황’)으로 대표되는 개혁의 중심과 광종으로 대표되는 반개혁의 중심이다. 이에 이학 집단은 효종 주위에, 관료 집단은 광종 주위에 몰려들어 각기 정치적 파란을 선동했다. 그 대표적인 예로는 다음을 들 수 있다. 왕회의 집정 시기에는 관료 집단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어서, 그들은 이학 집단이 공격해오면 다양한 책략으로 반격했다. 그러나 고종의 영향에서 벗어나게 된 효종이 스스로 결단을 내려 이학파 사대부들과 더불어 연합하고 주필대로 하여금 왕회의 재상직을 대신하도록 하자, 관료 집단은 황권의 지지를 잃었고 그로 인해 수비에서 이학자들을 선공격하는 단계로 나아가기 시작했다.(여기서 ‘황권’은 스스로 하나의 체계를 이루는 권력 구조를 뜻한다. 이러한 황권의 운용에 참여하는 자들로는 재위 황제 및 퇴위 황제뿐 아니라 태자·황태후·황후·종실·근행近幸 등 여러 황실 구성원이 거기에 포함된다.)
저자는 이처럼 권력세계에서 ‘변혁’을 추구해 합리적 질서를 세우려 한 이학자 집단과, ‘안정’을 추구해 기존 질서를 유지하려 한 관료 집단이 권력을 놓고 황권 주위에서 각기 분투하는 장기적 과정을 하나하나 드러냄으로써 ‘잃어버린 고리’ 시기의 역사적 원형을 고스란히 복원해내고 있다. 사대부와 정치문화 간의 관계를 다루는 데서 그 실제 중점을 이학파 사대부, 관료 집단, 황제 등 당시 권력세계 3대 원동력 간의 상호작용에 맞추는 것이다. “효종, 광종, 영종 삼조에 걸친 격렬한 당쟁으로 ‘잃어버린 고리’를 재구성해, 경원당금의 파란을 이해하도록 해준다. 이로써 ‘주희 연구의 신경지’를 개척했다”라는 리슈쉬안(홍콩중문대 철학과 교수)의 평가는 결코 주례사 비평이 아니다.(이는 그가 한편으로는 이 책에 가장 공격적으로 비판을 제기한 인물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는 점으로도 알 수 있다.)
특히 제12장은 이 ‘잃어버린 고리’ 시기 황권 내부의 이면을 온전히 파악하기 위해, 효종이 위로는 태상황으로서 25년간 여전히 조정과 자신을 통제하는 ‘아버지’ 고종과 일으켰던 심리적 충돌과 아래로는 황위 선양을 기다리다 정신착란에 걸린 ‘아들’ 광종(1189년 43세에 황제 즉위)과 일으켰던 심리적 충돌을 ‘심리사학psychohistory’을 원용해 풀어낸다. 효종이 유년 시절에 고종의 양자로 들어가 경쟁을 거쳐 황태자로 선정되고 이후 황위에 올라 선양하기까지가 효종이 심리적 유예기 및 정체성 위기를 거쳐 소년에서 성인으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다루어진다. 이 효종의 ‘생명사life history’ 연구는 따로 읽어도 좋을 만큼 매우 흥미롭다.
“사람을 알면 그 시대를 안다知人論世” “물이 마르면 돌이 드러나게 마련이다水落石出”
저자 위잉스가 “토마스 아퀴나스에 비견되는 12세기 유학자 주희”를 만나는 방법
옮긴이는 “위잉스의 사료 수집과 고증은 매우 엄정하고 치밀하다. 한학적 기본 소양과 근대적 학문 방법론의 습득이 이상적으로 조화를 맺어 거둔 결실이 바로 그런 데서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한다”라고 밝힌다. “매우 엄정하고 치밀한 사료 수집과 고증”은 어느 장, 어느 부분이라 할 것 없이 전방위적으로 적용된다. 독자들은 책 곳곳에서 무릎을 치며 저자의 성실성(사료 수집)과 전문성(고증·분석·논증 등) 중 별점을 어디에 더 주어야 하나 하는 행복한 고민을 하게 될 것이다.
요컨대 저자는 “사람을 알면 그 시대를 안다는 관점”으로 주희 및 주희가 실제로 경험한 세계를 “증거가 허락하는 한 ‘물이 마르면 돌이 드러나는” 수락석출水落石出의 수준으로 밝히고 있으며, 이를 통해 ‘주희의 시대’ 사대부와 정치문화의 관계를 전면적으로 재구성해내다. 저자는 “숨은 뜻을 끌어 올리고 핵심을 이끌어내는 것은 서술 과정 내내 내가 견지한 최고의 지도 원칙이었다”고 밝힌다. 이 책을 읽어나가는 독자들은 “송대 사대부들, 특히 주희가 몸담았던 역사적 세계가 손에 잡힐 듯 다가와, 어떨 때는 고뇌에 찬 주희의 한숨 소리를 바로 옆에서 듣는 듯한 착각이 들 때도 있었다”고 번역 과정을 털어놓는 옮긴이의 술회가 결코 과장이 아님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