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한 여자’와 ‘산 하나’를 자신의 눈에 담아 오겠다는 강렬한 소망에 이끌려 저자는 어느 날 시칠리아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여기서 ‘한 여자’란 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시칠리아 출신 화가 안토넬로 다 메시나가 그린 「성모영보의 마돈나」이고, ‘산 하나’는 아직도 뜨거운 불을 품고 그것을 분출할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는 활화산, 에트나이다.
귀중한 것은 쉽사리 만날 수 없는 것인지, 간절하게 만나고픈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마돈나와 에트나 산은 쉽사리 그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두 주인공을 만나기 위한 지은이의 여정 속에는 시칠리아 섬의 매력이 듬뿍 담겨져 있다.
목차
여행을 시작하며
1부. 한 여자
시칠리아의 얼굴, 메두사
곁가지 | 그리스 피토스에서 찾은 메두사와 페르세우스
마피아의 피가 스르는 곳
헛걸음 뒤에 맛본 모자이크의 황홀경
뒷골목에서 만난 팔레르모의 매력
한 여자 마돈나
곁가지 | 피할 수 없는 오직 하나, 죽음
2부. 산 하나
드디어, 에트나와 마주서다
신이 떠나버린 돌무덤, 아그리젠토
곁가지 | 아그리젠토의 현자들
돌의 꽃밭, 카살레의 빌라 로마나
곁가지 | 시인의 머리에 얹어진 월계수, 다프네
테아트론과 신화가 살아 있는 시라쿠사
곁가지 | 에트나의 괴물, 티폰
에트나에 오르다
저자
박제
출판사리뷰
시칠리아 섬의 매력
괴테는 『이탈리아 여행기』에서 “시칠리아를 보지 않고서는 이탈리아를 보았다고 할 수 없다”고 썼다. 도대체 어떤 매력을 갖고 있는 곳이기에? 이탈리아 남단에 위치한 시칠리아는 본토와는 사뭇 다른 고유의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다. 또한 과거에는 그리스 문명권에 속했던 곳이기에 고대 그리스?로마 문명을 곳곳에 품고 있어, 시칠리아 여행을 그리스·로마 신화 여행이라고 바꿔 말해도 손색이 없다.
시칠리아의 상징인 머리에 다리가 셋 달린 메두사 도상을 만나면서 여행은 시작된다. 섬의 형태가 삼각형 모양인 시칠리아를 옛 그리스 사람들은 ‘세 개의 다리’를 뜻하는 ‘트리나크리아’라고 불렀는데, 다리 셋 달린 메두사는 여기서 유래한다. 지은이는 더 나아가 메두사가 시칠리아의 상징이 된 이유를 궁금해 하면서 메두사를 벌한 아테나 여신 이야기로, 메두사를 죽인 페르세우스와 그의 어머니 다나에 이야기로 신화 이야기보따리를 펼친다. 이처럼 이야기가 하나의 실마리에서 시작해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것이 이 책의 매력 중 하나이다. 지은이의 풍부한 지식은 여행지의 사소한 사물 하나를 만나면서 꽃을 피우고 풍성한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낸다.
신화뿐만이 아니다. 르네상스 시대 그림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얼굴을 한 어물시장의 장사치, 해산물과 농산물이 풍요롭게 진열돼 있는 부치리아 시장, 가족사진이 잔뜩 걸려 있는 구멍가게, 이층집에서 끈을 달아 아래로 드리운 장바구니, 시칠리아의 주요 교통수단인 스쿠터, 노천카페에서 만난 에스프레소와 마키아토의 향기…… 유난히 사람 사는 향기를 진하게 풍기는 이 모든 장면이 시칠리아의 매력을 담뿍 전한다.
한 여인과의 만남, 「성모영보의 마돈나」
몇 번의 여행에서 꼭 직접 보리라 다짐한 그림을, 순회 전시나 보수 중이라는 등의 이유로 만나지 못한 적이 있는 지은이는 이번에도 그런 불운을 겪게 될까 조마조마하다. 그런 초조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성모영보의 마돈나」가 소장돼 있는 팔레르모 지방미술관을 찾은 첫날, 미술관은 육중한 닫힌 문으로 지은이의 마음을 애태운다. 별다른 설명도 없이 그저 이틀 동안 특별히 문을 닫는다는 무심한 종잇조각이 달랑 붙어 있을 뿐이다. 세월아 네월아, 원하는 만큼 머무를 수 없는 여행자의 마음은 가뜩 졸여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 여행은 바로 그림 속 여인을 만나기 위한 목적이 팔 할. 꼬박 이틀을 기다려 지은이는 그토록 바라던 그림과 직접 만날 기회를 갖게 된다.
시칠리아를 대표하는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안토넬로 다 메시나가 그린 이 그림은 당대에 매우 자주 그려졌던 주제인 ‘성모영보’의 장면을 다루고 있다. 성모영보란 천사가 마리아에게 찾아와 신의 아들, 예수를 잉태하게 될 것임을 알리는 내용이다. 그런데 보통의 성모영보 그림에 마리아와 천사가 함께 등장하는 것과는 달리, 메시나의 이 그림에는 오로지 성모 마리아만 그려져 있다.
그림 속 마리아는 후광도 두르지 않고 있어서 언뜻 보아서는 성모영보를 그린 것인지조차 알아차리기 힘들다. 더구나 가로 34.5센티미터, 세로 45센티미터 정도의, 매우 작은 크기의 그림이다. 그런데도 성모는 범접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풍긴다. 푸른빛 옷감이 감싸고 있는 성모의 얼굴은 뜻을 가늠하기 어려운 신비로운 표정으로 큰 매력을 풍긴다. “그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누구도 다가갈 수 없는 차가운 신성함”이 느껴지고 “애써 감추려 해도 어디선가 스미어 나오는 관능의 아름다움”이 보인다. 바로 이러한 미묘함이 지은이를 시칠리아로 이끌었고, 이 그림이 시칠리아를 대표하는 상징이 되도록 한 힘이 되었다.
그림 앞에서 꼬박 30분을 보낸 지은이는 못내 아쉬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그림을 직접 보기만 하면 자신을 애태웠던 그 매력의 비밀이 풀릴 것이라 믿었지만, 작은 그림이 발산하는 힘은 그저 한 번의 방문으로는 채워지지 않는다.
시칠리아 신화 여행
팔레르모에서 성모를 만나고 난 후 지은이는 에트나 산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시칠리아의 북서쪽에 위치한 팔레르모에서 「성모영보의 마돈나」를 만난 후 동쪽 끝에 위치한 에트나 산까지는 200킬로미터의 거리이지만, 지은이는 그리로 가는 길에 아그리젠토, 카살레, 시라쿠사를 거쳐 가고, 그곳에서 고대 그리스와 로마제국의 문화를 만난다. 바다에 면한 아그리젠토와 시라쿠사에는 해상문화를 꽃피웠던 고대 그리스의 흔적과 마주하고, 내륙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카살레에서는 화려했던 로마제국의 유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아그리젠토에는 열 개가 넘는 그리스 신전들이 바다를 맞는 언덕을 따라 줄지어 서 있다. 신전들은 아침 첫 햇살을 맞이하기 위해서 모두 동쪽을 바라보고 서 있는데, 여기서 지은이는 토함산 높은 곳에 세워져 아침 첫 햇살이 본존불에 닿도록 지어진 석불사를 떠올린다. 아그리젠토의 신전들은 그리스 신전 하면 으레 떠올리는 하얀 대리석으로 지어져 있지 않다. 이곳을 구성하고 있는 지질이 화산 활동의 결과로 만들어진 응회암으로 이뤄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그리젠토의 신전들은 뜨거운 불의 기운을 간직한 붉은빛으로 빛난다.
아그리젠토의 유적지에 천 년의 세월을 간직하고 서 있는 올리브나무들도 지은이의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다. 아테나 여신이 전해주었다는 전설을 간직한 올리브나무는 “할아버지가 심어 아버지가 가꾸고 아들이 거두어들인다”는 말이 있을 만큼 오래도록 키워야 실한 열매를 맺는다. 수많은 신전과 함께 세월을 이겨온 올리브나무들은 “은빛 머리칼을 휘날리는 현자”처럼 길게는 3천 년에까지 이르는 세월을 제 몸에 새기고 여전히 새 잎을 피워내고 있다.
지은이의 발걸음이 멈추는 다음 장소는 로마제국의 화려했던 문화가 그 자취만을 쓸쓸히 남기고 있는 카살레의 빌라 로마나이다. 기원전 300년경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빌라 로마나는 건물 면적만 1천 평이 넘는 대단한 규모를 자랑한다. 특히 공중목욕탕 터와 건물 곳곳에 아직도 벽을 장식하고 있는 모자이크 장식에서 대단했던 로마제국의 영화를 엿볼 수 있다. 모자이크는 사냥 장면, 전차 경주, 신화 등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품고 있지만 그중 단연 관심을 끄는 것은 ‘비키니를 입은 미녀들’이다. 가슴과 아랫부분만을 가린, 그야말로 ‘비키니’를 입은 여인들이 아령을 들거나 원반을 던지는 등 운동을 하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 모자이크를 보고 있으면, 이것이 과연 기원전에 만들어진 것인지 두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에트나 화산에 도착하기 전 마지막 기착지인 시라쿠사에서는 고대 그리스 시대의 원형극장이 눈길을 끈다. 파란 하늘과 드넓은 바다를 배경으로 고대 그리스의 야외극장 ‘테아트론’이 모습을 드러낸다.
“유럽을 돌아보려고 여행을 나설 때 사진기는 두고 오더라도 꼭 지녀야 할 것이 있다면 성경과 그리스 로마 신화의 기본 지식”이라고 말하는 지은이의 안내를 따르다보면 어느새 여행과 배움이 다른 말이 아님을 알게 된다.
신화의 용광로, 에트나 산
변덕스러움으로 이름 높은 에트나 산은 그 높이마저 시시때때로 바뀐다. 여전히 활동하고 있는 화산이기에, 한 번 폭발할 때마다 높이가 바뀌기 때문이다. 변덕스러움은 그뿐만이 아니다. 에트나 산은 좀처럼 여행자들에게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높은 산봉우리는 곧잘 구름 속에 숨어 있게 마련이어서, 요행히 날씨가 맑다 해도 운이 좋아야 산의 전체 모습을 눈에 담아갈 수 있다.
에트나 산은 그야말로 신화의 용광로이다. 어떤 이야기에서는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의 아궁이로도 알려져 있고, 또 다른 이야기에서는 제우스에 대항했던 괴물 티폰이 갇혀 있는 감옥이다. 이 괴물이 화를 억누르지 못하고 뿜어내는 사납고 세찬 불덩이가 에트나 화산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에트나 산과 관련된 또 다른 그리스 로마 신화 이야기는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와 그녀의 딸 페르세포네, 그리고 지하의 신 하데스와 관련돼 있다. 이 이야기가 바로 지은이를 시칠리아로, 에트나 산으로 이끌었다.
에트나 산을 보고자 하는 마음은 루브르 박물관에서 마주친 한 점의 그림에서 싹텄다. 니콜로 델 아바테가 그린 「페르세포네의 납치」가 바로 그것이다. 지하의 신 하데스가 데메테르의 딸 페르세포네를 납치하여 지하세계로 데려가는 장면을 담은 이 그림에서, 지하세계로 통하는 입구가 바로 에트나 화산이었던 것이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그림 한 점을 바라보며 시칠리아 섬을 꿈꾸던 지은이는, 이제 에트나 산에 직접 서서 다시 예전에 마음속에 품어둔 그림을 되새긴다.
어린 시절의 앞산
에트나 산을 마지막으로 여행을 정리하면서, 지은이의 생각은 어린 시절로 줄달음질친다. 바닷가에서 자란 지은이의 어린 시절 마을에는 산이 하나 있었다. 자라서 다시 가보았을 때는 나지막한 앞산에 지나지 않았지만 당시에는 그저 신비롭고 크게만 보였던 산이었다. 그 너머를 알 길이 없었던 그 앞산을 바라보며 지은이는 “수많은 상상과 동경의 시간”을 품었다. 어린 시절의 앞산과 똑같이 햇살을 되쏘는 바다를 배경으로 우뚝 서 있는 시칠리아의 거대한 산 에트나가 잊고 있었던 동경의 시간을 지은이에게 되살려준다. 어린 시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을 알게 되었어도, 여전히 꿈꿀 것과 경험해야 할 것이 남아 있음을, 그림 한 점이, 산 하나가, 시칠리아 여행이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지은이에게 여행은 그저 사진첩에 추억의 사진 한 장을 늘리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에게 여행이란 ‘배움’이다. “모난 구석을 깎아내고, 고정되어 있는 좁은 시야를 넓히고, 새로운 것과 부딪히면서 생각의 깊이를 파고 들어가고, 자신과 다른 것도 받아들일 줄 알게 되고, 어리석음의 정체를 보게 되고, 삶의 흐름을 절절히 느끼게 되는 과정”인 것이다.
반드시 제 눈으로 보기를 바라는 열망을 가슴에 품고 떠난 여행자가 전하는 이 기행문에서, 지은이는 진정한 배움의 여행이 무엇인지, 여행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최상의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중간 중간 별면에서 보여주는 예술작품의 도판과 그에 감춰진 내력은 이 책을 더욱 풍성한 읽을거리로 만들어준다. ‘곁가지’ 코너에서는 여행의 여정에서 살짝 벗어나 ‘메두사와 페르세우스’ 이야기, 중세부터 서양인의 정신세계에서 큰 자리를 차지해온 ‘죽음의 승리’ 주제, 올리브나무 이야기, 그리스신화에서 월계수로 변한 다프네 이야기, 그리고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에트나 산 이야기 등이 다채롭게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