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두 도시에서 만나는 진짜 러시아
살다 보면 강렬한 어떤 것을 만날 때가 있다. 그것은 사람일 수도 있고 사물일 수도 있고 장소일 수도 있다. 말하자면 러시아가 그런 곳이다. 러시아에는 독특하면서도 서로 다른 멋을 지닌 두 도시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다. 이 책을 쓴 여행자 K에게도 러시아의 두 도시는 강렬한 무엇으로 남아 있다. 네 길이 얽히고설킨 환각과 환영의 도시이자 수많은 사연과 이야기가 있는 도시로 말이다.
한때는 “북극곰이 보드카에 취해 길거리에서 자고 있다는 풍문”도 들렸고, “KGB가 스파이를 증기기관차 화실에서 태워 흔적도 없이 처리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둘 모두 사실이 아니지만 러시아는 여전히 소문과 풍문이 가득한 ‘비밀의 나라’임에는 틀림없다. 숱한 여행의 끝에 여행자들의 발길이 닿는 곳이자, 볼셰비키와 혁명의 나라, 도스토옙스키와 문학의 나라, 차이콥스키와 음악의 나라, 어쩌면 가눌 곳 없는 마음의 유형지일지도 모를 러시아. 우리에게는 홍범도, 나혜석, 이태준, 오장환, 주세죽, 빅토르 최와 이어진 카레이스키의 땅을 소개한다.
여행자 K의 풍부한 감성이 이끄는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이국의 땅 곳곳에 숨은 위대한 역사와 문학과 예술, 그리고 우리 민족의 편린들이 마치 긴 여행을 한 듯, 머리를 지나 가슴에 시나브로 스며들 것이다. 이 책은 러시아를 가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문사철을 고루 담은 여행 지도가 될 것이고, 러시아를 가본 사람들에게는 미처 보지 못한 러시아를 발견하게 해줄 것이다.
목차
머리말_ 고춧가루의 비밀을 찾아 떠난 여행
1 러시아로 가는 길
꿈같은 여정의 시작
2 ‘그 여자’ 상트페테르부르크
여긴 러시아가 아니라 유럽이잖아!
황제의 길
역사의 현장 궁전 광장/ 세계3 대 박물관 예르미타시/ 혁명의 현장 2층 작은 식당/ 권력과 사랑을 요리한 예카테리나2 세/
황금 공작 시계의 사연/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 베르사유보다 멋진 여름 궁전/ 일꾼 황제 표트르의 오두막/
토끼섬의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문화의 길
지상의 천국, 성 이사크 성당/ 앙글르테르 호텔과 시인 예세닌/ ‘기도발’의 최고 존엄 카잔 성당과 쿠투조프 장군/
미하일롭스키 예술 광장/ 옥춘사탕 피의 사원/ 센나야 광장, 도스토옙스키를 찾아서/ 마린스키 극장과 안나 파블로바/
예술가의 무덤, 알렉산드르 넵스키 수도원/ 푸시킨과 문학 카페/ 넵스키 대로, 고골과의 시간 여행/ 돌과의 대화, 유람선 투어
혁명의 길
혁명의 시작, 데카브리스트 광장/ 궁전 광장, ‘피의 일요일’ 사건과 이사도라 덩컨/ 핀란드 역, 레닌과 혁명의 판도라/
혁명, 오는 자와 떠나는 자/ 혁명 성지 스몰니 학원/ 혁명의 발포, 순양함 오로라/
‘반동의 도시’상트페테르부르크, ‘혁명의 도시’모스크바
조선 독립의 길
비운의 외교관 이범진
로스트랄 등대, 왁자지껄 러시아 결혼 뒤풀이
3 ‘그 남자’ 모스크바
모스크바 역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다
안나 카레니나, 모스크바행 열차에 오르다/ 간이역 클린, 차이콥스키 박물관/ 안나, 운명의 브론스키를 만나다
다시 찾은 모스크바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 모스크바의 흉물, 스탈린의7 자매/ 우주박물관과 오스탄키노 타워/
옛 KGB 건물과 마야콥스키 박물관/ 볼쇼이 발레, 조선사절단이 본 여성 학대?/ 국립도서관, 레닌이냐 도스토옙스키냐
크렘린, 차르의 윤회의 길
동장군을 아시나요/ 나폴레옹이 울고 간 크렘린/ 차르의 대포/ 크렘린 3대 성당, 차르의 윤회의 길/
영화 <러브 오브="" 시베리아="">, 이반 대제 종탑/ 모스크바에 블라디미르 1세 동상을 세운 이유/ 레닌과 홍범도
붉은 광장은 억울하다
러시아 비목/ 붉은 광장, ‘빨갱이 광장’이 아니라 ‘아름다운 광장’/ 죽어서도 잠들지 못하는 레닌/
붉은 광장의 역사 바로 세우기/ 카잔차키스·지드·나혜석 vs 이태준·이기영·오장환/ 장하도다! 스텐카라진의 최후/
마법의 성, 성 바실리 성당/ 키타이고로드, 나폴레옹과 초토화 전략/ 모스크바에도 독립유적지가?
비운의 여인, 주세죽을 아십니까
발추크섬, 사랑의 다리/ 모스크바강의 표트르 대제 동상/ 로켓 모양의 유리 가가린 동상/
박헌영 부인 주세죽, 모스크바에 잠들다/ 여행과 환율
승리 공원에서 지하철 타고 아르바트 거리로
승리 공원, 나폴레옹, 《전쟁과 평화》/ 혁명은 지하철에 살아 있다/ 아르바트 거리와 푸시킨/
러시아가 사랑한 고려인 가수, 빅토르 최/ 투란도트 공주가 수수께끼를 내면/ 톨스토이의 집 박물관
노보데비치 수도원과 참새의 언덕
노보데비치 수도원과 백조의 호수/ 노보데비치 묘지에 잠든 김규면/
모스크바 대학, 건물은 사회주의, 강의는 자본주의/ 참새 언덕, 《거장과 마르가리타》/
러시아 대문호를 만나러 가는 쿠르스키 기차역러브>
저자
여행자 K
출판사리뷰
황제의 길에서 조선 독립의 길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걷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팜므파탈이었다. 뱃사공이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세이렌의 노래에 어쩔 수 없이 빨려가듯 나는 그녀의 치명적 유혹에 질질 끌려갔다. 나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구경한 것이 아니라 그녀가 부르는 곳으로 쫄랑쫄랑 따라갔을 뿐이다. 그러나 그 길은 고통과 죽음의 길이 아니었다. 환희와 마법의 길이었다.”
여행자 K는 러시아에서의 첫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러시아 도시에 대한 편견을 한 방에 날려버리는 매혹적인 도시”로 소개한다. “도시 전체가 문화유산으로 가득 찬 박물관”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 도시에서 여러 길을 만난다. 황제의 길, 문화의 길, 혁명의 길, 조선 독립의 길이다.
러시아의 지난 천여 년의 역사는 차르와 민중의 싸움의 역사였다. 차르는 ‘카이사르’에서 온 말로, 영어로는 우리에게 익숙한 ‘시저’다. 곧 러시아 황제를 일컫는다. 여행자 K는 첫 여정을 바로 차르의 길, 곧 황제의 길로 잡았다. 궁전 광장을 거쳐 예르미타시 박물관을 지나 예카테리나 2세를 만난다. 그러고는 렘브란트를 보고 여름 궁전에 들러 궁전의 아름다움에 빠지더니, 어느새 표트르 황제의 오두막을 거쳐 자야치섬에서 첫 번째 길을 마친다.
문화의 길에서 그는 지상의 천국으로 불리는 이사크 성당을 둘러보고 앙글르테르 호텔에서 러시아의 랭보, 시인 예세닌과 이사도라 덩컨의 비극을 가까이에서 느낀다. 포근한 어머니 같은 카잔 성당을 지나 미하일롭스키 예술광장과 피의 사원을 차례로 찾아가는 동안, 그는 도스토옙스키, 푸시킨, 고골과 조우한다. 이름만으로도 이미 벅찬 이들의 숨결을 느끼며 거장들의 흔적을 더듬는다.
‘12월에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이라는 뜻의 테카브리스트 광장에서 여행자 K는 다음 여정인 혁명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피의 일요일 사건과 2월 혁명의 현장인 궁전 광장을 둘러본 그는, “낡은 것은 사라졌으나 새로운 것이 아직 나타나지 않은 상황”에서 핀란드 역에 도착한 혁명가 레닌을 만난다. 그러나 역사의 변곡점에는 ‘오는 자’와 ‘가는 자’가 있기 마련이다. 혁명의 쓸쓸함은 여기에서 비롯한다. 혁명의 성지로 여겨지는 스몰니 학원을 둘러본 여행자 K는 볼셰비키 혁명 이후 ‘반동의 도시’로 전락했다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추억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 페트로그라드, 레닌그라드,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로 가기 전 그의 여정은 조선 독립의 길을 걷는 것으로 일단락된다. 조선의 외교관 이범진의 묘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까닭이다. 일본의 조선 침탈을 막으려고 몸부림치다 아관파천을 주도한 인물. 그는 조선에서 멀리 떨어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독립운동의 길에 뛰어들었으나 결국 대한제국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모스크바 역에서 쿠르스키 기차역으로, 다시 만난 모스크바
“나는 모스크바가 내뿜는 마술적 냄새에 홀려 무시무시한 살인의 숲속으로 끌려갔다. 그런데 그곳은 마피아 소굴이 아니라 놀랍게도 칸딘스키가 그린 동화의 마을이었다. 황금색 왕궁과 알록달록 알사탕 성당이 나를 반겼다. 셰에라자드가 들려주는 수많은 사연과 이야기보따리가 모스크바의 비밀창고 속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안나 카레니나와 《전쟁과 평화》의 나타샤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사랑도 그 속에 숨어 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여정을 마친 여행자 K는 모스크바행 기차에 오른다. 그 철길을 달린 민영환, 이범진, 이상설, 이준, 이태준 등을 떠올린 그는 묘한 긴장감에 휩싸인 채 모스크바로 향한다. 차이콥스키가 살았다는 클린을 지나 모스크바의 레닌그라드 역에 도착한다.
자본주의에 대항해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해 만들었으나, 흉물스러운 건물의 상징이 된 ‘스탈린의 7자매’가 여전히 서 있는 도시. 여행자 K는 이 도시 외곽에서부터 중심부로 여정을 잡는다. 우주 박물관과 오스탄키노 타워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길은, 공포의 상징과도 같은 옛 KGB 건물과 바로 맞은편에 있는 아먀콥스키 박물관으로 이어진다. 퇴색한 이념의 그림자와도 같은 풍경들이 마치 추억인 듯 여행자 K를 슬며시 스쳐간다. 혁명 광장의 카를 마르크스 동상, 크렘린의 입구에 있는 레닌 도서관. 그는 “나는 존재한다. 고로 사랑한다”라는 도스토옙스키의 말을 떠올리며, 크렘린으로 들어선다.
높이 솟은 트로이츠카야 타워가 나폴레옹마저 옹색하게 만든 크렘린 일대에는 푸틴의 집무실을 비롯해 차르의 대포가 수문장처럼 지키고 있는 성모승천 성당, 성모수태고지 성당, 대천사 성당이 있다. 크렘린 일대를 구석구석 살피던 여행자 K는 크렘린 집무실에서 봉오동 전투의 영웅 홍범도 장군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독립에의 희망을 이곳 머나먼 이국의 땅에서나마 키웠기 때문이다. 장엄했던 러시아의 근현사를 관통하는 풍경들 속에서 발견한 핏줄의 역사는 가슴 뭉클하기만 하다.
그는 크렘린을 뒤로 하고 붉은 광장으로 발길을 옮긴다. 우리에게 이념의 색체 탓에 왜곡되어 인식되는 붉은 광장은 ‘빨갱이 광장’이라는 뜻이 아니라 ‘아름다운 광장’이라는 뜻이다. 이곳에 있는 피라미드 모양의 건물에는 그 유명한 레닌이 방부 처리되어 누워 있다. 죽어서도 죽지 못한 레닌이 보여주듯 공산주의 정권의 통치 기간 동안 이곳은 이념의 휘장에 갇혀버렸다. 이태준과 오장환이 열광한 도시, 그러나 나혜석에게는 너절한 도시. 여행자 K는 이상에 가로막혀 현실감을 잃게 하는 도시의 붉은 광장이 아프다. 하지만 형형색색의 빛깔로 마법처럼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성 바실리 성당 역시 이곳에 있다.
미묘한 감정이 뒤섞이게 하는 붉은 광장 일대를 빠져나온 여행자 K는, 구세주 그리스도 성당의 황금빛 돔에 반사된 빛이 번쩍이는 거리를 따라 발추크섬에 이른다. 섬에는 자유의 여신상을 방불케 하는 표트르 대제의 동상이 우뚝 솟아 있다. 섬을 나와 모스크바강을 건너도 온 도시가 역사의 현장이다. 강변의 ‘10월 호텔’, 고리키 공원을 끼고 뻗은 레닌스키 대로, 솔제니친이 묻힌 돈스코 수도원에 이어 가가린 광장이 연이어 나타난다. 조금 더 가면 비운의 사회주의 혁명가 주세죽이 잠든 다닐로프 공동묘지가 있다. 박헌영의 부인으로 알려진 그녀는 치열한 삶을 살다가 모스크바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았다.
한편, 모스크바에서는 ‘지하 궁전’이라 불리는 지하철을 반드시 타야 한다. 바로크 양식으로 만들어져 소련 시절의 혁명 유적이라고 할 만하다. 여러 조각과 동상, 그림 등 예술 작품이 가득한 지하 박물관인 셈이다. 여행자 K는 중간중간 역에서 내리며, 파르크 포베디 공원, 일명 ‘승리 공원’의 개선문과 오벨리스크 승전기념탑, 대조국 전쟁 박물관, 혁명 광장을 지나 스몰렌스카야 역에 내린다. 아르바트 거리가 있다. 푸시킨 등 러시아의 위대한 예술가들이 거닐었고, 고려인 가수 빅토르 최의 추모벽이 있는 곳이다.
이윽고 모스크바에서의 마지막 날. 여행자 K는 모스크바에서의 마지막 일정을 노보데비치 수도원에서 시작한다. [백조의 호수]의 영감이 된 장소이자 연해주의 항일투사 김규면 선생이 잠든 곳이다. 어둠이 내릴 무렵 참새 언덕에 오른 그는 모스크바의 야경을 바라보며, 과거와 현재, 역사와 예술, 한국과 러시아를 종횡무진할 수밖에 없었던 두 도시 여행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