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동양화가 김병종 서울대 미대 교수가 쓴 『김병종의 모노레터』는 한평생 열정을 불태우며 살아간 예인藝人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서른한 통의 편지다. 이미 『김병종의 화첩기행 1·2·3』을 통해 예술가의 발자취를 꾸준히 더듬어온 그는, 이번에는 만년필로 눌러쓴 편지에 우표를 붙여 보내는 고전적인 형식(실제로 그는 육필을 고집하고 있다)을 선택해 존재의 내밀한 고독을 담아낸다.
목차
편지를 보내며
미치다 赤적
육신을 허물고 혼불로 타오른 푸른 넋 / 최명희
침묵의 말, 세상을 토하다 / 유진규
태양을 사랑한 시대의 이단아 / 허균
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하지 않았네 / 황재형
다시 노래를 꽃으로, 길은 저 봉우리로 / 김민기
잊혀진 순결과 열정의 혁명가 / 김산
자연과 인간, 연극이 하나되다 / 이종일
식지 않는 플라멩코의 핏빛 자유 / 조광
음지 綠녹
시인의 가슴에서 흐르는 강물의 언어 / 김용택
산그늘에서 만난 음지식물의 자화상 / 박남준
강릉에서 보낸 마지막 편지 / 권오철
베를린에서 만난 물푸레나무 / 진은숙
생을 구원하는 이 고운 묵선 / 노은심
옛 수묵화속으로 걷다 / 치바이스
젊음이 출렁, 실험이 꿈틀하는 예술의 전방 / 젊은 피카소들
통영으로 향하는 꾸목의 나비 / 윤이상
바람 白백
열도에 흘러든 조선의 미 / 정조문
낡고 소멸하는 것들의 아름다움 / 정영희
한국혼을 노래하는 밤의 여왕 / 헬렌 권
백색에 빠진 도공의 혼 / 권대섭
오랜 세월을 견뎌낸 석인의 미소 / 세중옛돌박물관
문학의 숲에서 온 편지 / 이어령, 강인숙
한국의 바르비종에서 만난 옛 사랑 / 미사리와 양평
닫다 黑흑
간이역에서 나를 보다 / 곽재우
진해에서 피고 진 남도의 화인 / 유택렬
흑백다방을 감싸는 꽃잎의 추모곡 / 유경아
내 사랑의 열병은 깊은 자국을 남기고 / 오정희
전설이 되어버린 춤의 여인 / 최승희
오래된 추억으로부터의 초대 / 장미의 숲
베를린의 비밀 다락방 / 로호 갤러리
모든 곳에는 사람이 깃든다 / 이용상
저자
김병종 저자(글)
출판사리뷰
거리를 거닐 때면 누군가 나를 납치해주기를 꿈꾸곤 했다. 내 등 뒤로 자동차 소리를 들으면서 ‘지금이야!’라고 혼잣말을 하곤 했다.
- 앙토넹 포토스키 《청춘·길》에서
‘꿈’, ‘그리움’, ‘사랑’ 같은 말들이 비늘처럼 떨어져나간 일상의 자리에 편지 한 통이 도착한다. 공과금 납부 안내도, 연말의 마지막 가격 할인을 대대적으로 알리는 광고 전단도 아닌 이 두툼한 편지. 하지만 섣불리 뜯지 말길. 문명의 속도를 따라 빠르게 ‘업그레이드’ 된 당신의 삶을 흔드는, 낡고 쓸쓸하되 한없이 아름다운 기억과 마주칠지 모른다.
소설가 최명희, 한국 마임의 개척자 유진규, 시대의 음유시인 김민기 등을 다룬 1장 ‘미치다 赤’에서는 삶을, 때론 목숨까지 내놓으며 예藝와 의義의 부름에 화답했던 사람들의 붉은빛 열정에 주목한다. 《혼불》 1권을 출간했을 당시 문단의 냉담한 반응에도 다시 일어서 신들린 듯 소설 속 인물에 몰입한 최명희. 이렇듯 소신공양燒身共養하듯 작품에 매달리는 최명희를 지켜본 저자는 “소설이라는 것이 그토록 뼈를 삭이고 육신을 허물어내며 쓰는 것이라면, 그 짓 누가 하겠느냐”며 안타까워 하지만, 희미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한 채 “손가락으로 바위를 파듯 소설을” 완성하고 생을 마친다. 작가는 가고 작품만 남은 지금, 김병종은 소설의 무대가 된 남원 노봉 마을을 찾아간다. 첩첩산중의 이 전형적인 한국의 중촌中村에서 그는 생과 꿈을 맞바꾼 한 인간의 푸른 넋을 발견한다.
2장 ‘음지 綠’에서는 섬진강 시인 김용택, 모악산방 시인 박남준, 재독 화가 노은님 등 자본의 질서를 거부하고 자연에서 숨을 길러 생을 여는 인물들이 그려진다. 음지에 머문 예인의 삶을 찾는 김병종의 발길은 도시를 떠나 십 년 넘게 산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박남준 시인에게 향한다. 그러나 풀냄새 가득한 그의 청정한 삶과의 조우遭遇는 고통이기도 하다. 목가적 예술가들이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도시의 황량함, 시처럼 읽고 음미하는 문학이 어느덧 설자리를 잃어버린 이 즉물적 시대의 비극을 확인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떠나간 시인들이 하나둘 다시 돌아오는 살 만한 세상, 꽃들이 일제히 터지는 것 같은 그런 세상은 언제쯤 열리는 것일까요.”라는 물음만을 안은 채 그는 잿빛 도시로 돌아온다.
현재 발 딛고 선 공간을 벗어나 낯선 곳으로 향한 이들을 다룬 3장 ‘바람 白’에서는 고려미술관 설립자 정조문, 성악가 헬렌 권, 도예가 권대섭 등이 등장한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적〉의 ‘밤의 여왕’을 탁월하게 해석해내 세계 정상의 성악가 15인으로 꼽힌 헬렌 권. 그러나 그가 처음 독일행 비행기에 올랐을 때는, 음대입시에 실패한 재수생 신분이었다. 음악을 향한 열망 이외에는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서 독일로 날아간 그를 끝까지 붙잡아준 것은, 다름 아닌 고국의 아버지가 보내는 ‘편지’였다.
유택렬 화백과 그의 딸인 피아니스트 유경아, 소설가 오정희, 전설의 무용가 최승희의 발자취를 찾아 떠난 마지막 장 ‘닫다 黑’에서는, 현실논리 속에 점차 잊히고 있는 소중한 추억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중섭과 윤이상, 청마와 미당 같은 예술가들이 드나들던 진해의 흑백다방. 이곳을 운영하며 작품 활동을 하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피아니스트 유경아는 홀로 흑백다방에 남는다. 한때 뉴욕과 빈, 잘츠부르크의 화려한 무대를 꿈꾸었으나, “2층 화실에서 길 떠나는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아버지” 때문에 차마 길을 떠나지 못했던 그는, 빈 공간에 홀로 남은 뒤에야 “오히려 이제야말로 이 공간을 지켜내야겠다는 모진 마음”이 든다고 말한다. 흑백다방에 피아노를 옮겨다놓고 모든 소멸하는 것들을 위한 추모곡을 연주하는 그를 보며, 김병종은 유한한 인간이 시간에 맞설 수 있는 힘이 다름 아닌 기억임을 깨닫는다.
이렇듯 혼신의 힘을 다해 삶을 일구는 예인의 이야기는 때로는 따뜻한 감동으로, 때론 그 가련한 운명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다가온다. 찬미나 경탄 대신, 한 인간의 치열한 삶에 대한 공감으로 형상화한 것이기에, 김병종의 글과 그림은 삶의 진실과 가까이 있다. 화첩기행을 시작한 지 십여 년이 넘었지만 그 열정만은 여전히 파랗게 타오른다는 김병종. 일상에 젖은 발을 벗고 숨겨놓은 꿈과 열정을 찾아 떠나라는 그의 편지에 우리는 어떠한 답장을 써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