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우리 역사상 두 번째 국가, 부여
그 기원과 역사에 관한 가장 객관적이고 충실한 연구
부여는 중국 동북 지방의 쑹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예맥이 세운 고대국가로, 수준 높은 문화를 영위하면서 고조선에 이어 우리 역사상 두 번째로 국가 체제를 마련했다. 그 지배 세력의 일부가 이동해 고구려와 백제와 발해를 건국했고, 나아가 가야와 신라의 문화에까지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부여는 우리나라 고대국가 발전의 중요한 연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껏 부여의 역사는 한국 고대사의 중심에서 밀려나 있었다. 대부분의 역사서에서 중앙집권적인 고대국가가 성립하기 전의 초기 국가로 간략히 언급될 뿐이고, 학계의 연구도 활발하지 못했다. 『처음 읽는 부여사』는 ‘국내 1호 고조선 박사’인 한국교원대학교 송호정 교수가 그동안 고대사의 변방에 있었던 부여의 역사를 한국 고대국가의 출발점이자 원류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국내외 연구 성과를 종합해 저술한 책으로, 부여의 기원부터 성장과 쇠퇴, 제도, 생활과 문화에 이르기까지 지금껏 부여에 관해 밝혀진 모든 것을 집대성한 최초의 단행본이다.
목차
머리말 4
1 | 우리 역사 속 부여의 의미 11
고려 시대의 부여사 인식 ㆍ 조선 시대의 부여사 인식 ㆍ 일제강점기의 부여사 인식
해방 이후 부여사 인식
2 | 부여의 기원 42
부여라는 이름에 대해 ㆍ 부여의 건국설화, 동명 설화 ㆍ 부여를 세운 종족, 예맥
부여의 건국 시기 ㆍ 탁리국의 위치 ㆍ 첫 부여국, 북부여 ㆍ 동부여에 대한 고찰
3 | 부여의 성쇠 65
부여의 영역 ㆍ 부여와 고구려의 세력 경쟁 ㆍ 중국과 밀접한 교류 ㆍ 부여의 왕성
부여의 멸망과 부흥 운동
4 | 부여의 제도 100
중앙의 통치 조직 ㆍ 지방 통치 조직 ㆍ 부여와 삼국 초기의 정치체제 ㆍ 신분제도
5 | 부여인의 생활 123
가족 ㆍ 신앙 ㆍ 경제 ㆍ 예술 ㆍ 주거 ㆍ 법률 ㆍ 장례
6 | 부여와 중국 동북 지방의 고대 문화 139
초기 부여의 문화와 변천 ㆍ 바이진바오-한수 문화 ㆍ 시퇀산 문화 ㆍ 파오쯔옌식 문화
라오허선 유적 ㆍ 시차거우 유적 ㆍ 차이란 묘지 ㆍ 부여 관련 고고 문화의 명명
맺음말 167
주 171
연표 208
참고 문헌 211
사료 212
찾아보기 247
저자
송호정
출판사리뷰
왜 부여의 역사에 주목해야 하는가?
부여는 고조선 후기인 기원전 3세기 무렵에 등장해 중국 한나라와 밀접하게 교류하고, 주변의 유목국가와도 길항 관계를 유지하면서 만주 지역의 역사를 주도해 나갔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선조 이래 다른 나라에 패해본 적이 없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3세기 중엽까지는 강력한 군사력과 통치력을 소유했고, 494년 고구려에 최종 귀속되기까지 700여 년 동안 명맥을 유지했다. 이렇게 긴 역사를 이어간 부여에 대해 우리는 고구려, 백제, 신라와 같은 중앙집권적인 고대국가로 성장하지 못한 초기 국가의 하나 정도로 인식하고 있을 뿐이다.
이는 무엇보다 고조선과 고구려 중심의 역사 서술이 이어져 온 데다가, 문헌 자료는 물론 그것을 보충할 고고학 자료 역시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여의 역사는 한국 고대국가의 출발점으로서 재평가되어야 한다. 고구려, 백제, 발해는 부여의 후손임을 자처하며 자랑스러워했고, 신라와 가야 문화에서도 부여의 영향이 확인되었다. 뿐만 아니라 부여는 오늘날의 중국 지린성과 헤이룽장성 등 고대국가의 발전 과정에서 우리 민족이 품으려고 노력한 지역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던 국가로, 우리 역사의 각 시기마다 끊임없이 호출되는 이름이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고려시대 이래로 부여가 우리 역사 속에서 어떻게 서술되고 인식되었는가를 시대별로 개괄하고 있다. 부여는 영토 확장의 욕망이 표출되거나 우리 역사의 독자성을 강조해야 할 때마다 주목받던 대상이었다. 저자는 현재 한중일 사학계의 연구에 이르기까지 부여사 연구의 역사를 총정리하며 부여가 우리 역사에서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이름임을 보여주고 있다.
부여사를 중국사로 편입하려는 랴오허 문명론
한국과 중국 간의 심각한 분쟁과 갈등을 일으켰던 동북공정은 지난 2007년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지만, 중국에서는 ‘랴오허 문명론’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동북 지역의 역사를 상고시대부터 중국사로 편입하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랴오허 문명론’은 최근의 고고학 발굴 성과를 바탕으로 랴오허 일대를 중화 문명의 발상지로 본다. 이 지역에서 꽃핀 신석기 문화인 홍산문화를 황제黃帝의 후예들이 일으킨 것으로 전제하고, 이후 그 일대에서 발원한 모든 민족은 황제의 자손들이며 그들의 역사는 중국사의 일부라고 주장한다. 이 논리에 따르면 이 지역에서 발원한 예맥족은 중화민족의 일부가 되고, 그들이 세운 고조선, 고구려, 부여는 중국 왕조의 정치적 지배를 받은 고대의 지방정권으로 전락한다. 최근 중국 학자들은 이 논리에 기초해 다양한 견해를 쏟아 내고 있다. 그 일단을 중국 선양의 랴오닝성박물관 부여 전시장의 설명에서 발견할 수 있다.
부여는 중국 역사상 중요한 소수민족이다. 적어도 한 초漢初에 이미 중국 동북 지역 중부의 쑹랴오 평원에서 활동했다. 이 평탄하고 비옥한 땅에서 부여인은 700여 년간 살았고, 동북 지구의 경제와 문화 발전에 탁월하게 공헌했다. 부여는 건국 이래 한 왕조에 신하로서 복속했으며 그 관계를 친밀하게 유지했다. - 35쪽
그러므로 부여사를 충실히 연구하고, 그 결과를 잘 갈무리해 학계는 물론 대중과 공유하는 일은 한국 고대사의 전체상을 복원하고, 그것을 우리의 역사로서 분명히 자리매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이 책은 그 출발점이 되어 줄 것이다.
고고학 발굴 성과에 기초한 객관적이고 충실한 연구
저자 송호정 교수는 지린, 선양 등 만주 지역을 수십 차례 답사하고, 중국 연구자들과도 수시로 교류하며 중국 동북 지역의 고고학 발굴 성과를 꾸준히 수집하고 검토해 온 동북아 고대사 전문 연구자이다. 고대사에 대한 다양한 추론과 상상이 제기되는 가운데서도 언제나 “역사는 주장만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정확한 사료와 발굴 자료를 통해 실증해야 한다”는 신념을 고수해 온 저자는 이 책에서도 문헌 자료가 부족한 시기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고고학 자료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부여도 문헌 기록이 많지 않은 초기 국가인 만큼 발굴된 자료들을 통해 지리적 위치를 확정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 과제다. 그는 이 책에서 최근의 고고학 발굴 성과에 기초해 부여의 중심지였던 현재의 중국 지린시와 그 주변에서 발견된 기원전 8세기 이래의 여러 문화 유형을 소개하고 있다.
부여 건국 이전의 선주민 문화인 바이진바오-한수 문화와 시퇀산 문화의 시기와 특징, 주요 출토 유물을 소개한 뒤, 그다음 시기에 형성된 파오쯔옌식 문화의 주요 유적과 유물을 검토하며 근래에는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파오쯔옌식 문화를 부여 문화로 간주한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그리고 넓은 의미에서는 파오쯔옌식 문화에 속하나 유물 하나하나에서는 크고 작은 차이가 보이는 라오허선 유적, 시차거우 유적, 차이란 묘지 등의 발굴 결과를 구체적으로 검토하며 이곳들을 둘러싼 국내외 학계의 다양한 견해를 소개한다. 저자는 여전히 곳곳에서 발굴이 진행 중이고, 이미 발굴된 자료들 중에는 제대로 공개되지 않은 것들도 많기 때문에 특정 문화 유형이나 유적을 부여의 것이라고 단정 짓기는 어려운 일이라고 말한다. 합리적인 추론이 가능한 부분까지만을 엄격하게 제한해 서술한 이 책은 부여의 역사에 관한 가장 객관적이고 충실한 연구라고 평가할 수 있다.
주요 내용
부여의 기원
부여의 건국설화인 동명 설화를 보면 부여는 북쪽에서 쑹화강 유역으로 남하한 세력이 건국했을 가능성이 크다. 설화의 기본 줄기는 왕이 탁리국에서 엄호수를 거쳐 부여까지 망명해 도읍을 정했다는 이주移住 전설이다.
옛날 북방에 탁리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그 왕의 시녀가 임신을 했다. 왕이 그녀를 죽이려 하자, 시녀는 “달걀만 한 크기의 기운이 제게 떨어져 임신했습니다.” 했다. 그 뒤에 아들을 낳았다. 왕이 그 아이를 돼지우리에 버리자 (돼지가) 입김을 불어 주어 죽지 않았고, 마구간에 옮겨 놓았더니 말도 입김을 불어 주어 죽지 않았다. 왕은 천제의 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해 그 어머니에게 거둬 기르게 하고는 이름을 동명이라 하고 항상 말을 기르게 했다. 동명이 활을 잘 쏘자, 왕은 자기 나라를 빼앗길까 두려워 죽이려고 했다. 이에 동명이 달아나 남쪽의 엄호수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동명이 물을 건넌 뒤 물고기와 자라가 흩어져 버려 추격하던 군사는 건너지 못했다. 동명은 부여 지역에 도읍하고 왕이 되었다. 이렇게 북이北夷의 땅에 부여국이 있게 되었다. - 45~46쪽
그렇다면 부여를 건국한 이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논형』의 건국 전설에 따르면, 부여가 세워지기 전 그 지역에는 예인濊人이 살았다. 이들은 지린성 일대에서 돌널무덤과 시퇀산형 토기 문화를 영위했다. 한편 부여의 지배층은 맥족으로 그들이 예족의 땅으로 남하해 건국했다고 보기도 하는데, 맥족과 예족은 인류학적으로 동일한 종족에 속해 양자 간 차이를 구별하기가 어렵다. 예와 맥을 각기 따로 보기도 하고 포함 관계로 보기도 하는 등 여러 견해가 존재하지만, 원래 예 계통의 주민 집단이 살고 있던 랴오허 동쪽 지역에 북방으로부터 맥 계통의 주민 집단이 이주하고 융합을 통해 예맥이라는 종족 집단을 형성했다고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이해일 것이다.
부여의 영역
부여의 위치에 관한 구체적인 서술은 『후한서』, 『삼국지』, 『진서』에 나타난다. 『후한서』에 따르면 “부여국은 현도 북쪽 1000리에 있다. 남쪽으로는 고구려, 동쪽으로는 읍루, 서쪽으로는 선비와 접하며, 북에는 약수가 있다. 땅은 사방 2000리로 본래 예의 땅이었다. (……) 동이 지역에서 가장 평평한 곳으로 오곡이 자라기에 알맞다”. 『삼국지』에는 거의 같은 내용에 “산과 언덕이 넓은 못이 많은 곳”이라는 표현이 더해졌다. 한편 『진서』에서는 “부여국은 (……) 남으로는 선비와 접하며 북쪽에는 약수가 있다”고 해 남쪽 경계에 고구려 대신 선비가 등장한다.
현도군은 지금의 선양과 푸순 사이에 해당하는 곳으로 여기서 북쪽으로 1000리, 지금의 거리 단위로 한다면 700리에 해당하는 곳은 바로 지린성 중부 일대이고, ‘평평하고 넓은 못이 많은 곳’이라면 쑹화강 유역뿐이다. 부여의 북쪽 경계로 나온 약수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넌강·쑹화강으로 보지만 일부 헤이룽강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부여는 남쪽으로는 고구려와 접하고 있었다. 양한 시대 고구려는 요동군의 동쪽에 있었고 그 북쪽 경계는 당시 휘파허를 넘지 않았다. 또한 훈허 중류 지역에 있던 3세기의 고구려 ‘신성新城’(푸순의 고이산성)이 고구려 서북쪽의 요충지였다는 점에서 서북쪽으로는 훈허 중류 북쪽까지 뻗쳐 있었다고 본다. 그렇다면 부여는 진秦·한漢 대의 장성이 있던 카이위안과 휘파허 상류를 연결하는 선보다 북쪽에 자리했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문헌 자료와 고고학 발굴 결과로 추정해 볼 때, 선비와 맞닿아 있던 서쪽 경계는 대략 오늘날의 조올하에서 밑으로 솽랴오·창투 일대의 동요하 지역까지 이르렀고, 읍루와 맞닿아 있던 동쪽 경계는 장광차이링과 웨이후링 일대였을 것으로 보인다.
부여와 고구려의 세력 경쟁
부여는 고구려와 세력 경쟁을 통해 국력을 키워 나갔다. 처음에는 둘 사이에 군사적 연맹이 성립되어 있었지만, 나중에 고구려가 부여의 역량을 넘어서고부터는 곧바로 부여를 병탄하려고 했다. 그래서 부여는 한의 손을 잡고 고구려에 맞섰고, 그 결과 관계가 점차 악화되었다.
부여 왕실은 군사·외교적인 방법으로 고구려를 계속 예속시키려 했지만, 세력을 키운 고구려는 대무신왕 5년(22) 부여의 남쪽 경계 지역에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큰 싸움 끝에 결국 부여가 이기긴 했으나, 부여는 대소왕이 죽고 수많은 군사를 잃어 통치층에서 불안과 동요가 일어났으며 고구려로 넘어가는 자들이 늘어났다. 이 전쟁을 계기로 부여는 국력이 뚜렷이 약해졌다.
2세기 이후 부여는 고구려의 발전을 견제하기 위해 후한과 밀접한 외교 관계를 맺었다. 고구려가 현도성을 공격하자 부여 왕은 왕자 위구태를 후한에 파견해 맞서 싸우게 했다. 북방의 한랭한 땅인 쑹화강 유역에 자리 잡은 부여가 온난한 랴오허 유역으로 진출하려 하고, 압록강 중류 지역의 산간지대에 자리 잡은 고구려가 농경지로서 혜택을 입은 랴오둥으로 진출하려고 한 것은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기 위한 당연한 요청이었을 것이다. 후한은 이런 대립을 교묘하게 이용해 이민족 지배 정책을 실시했다. 3세기를 넘어서면서부터 부여는 서쪽에서 세력을 키운 선비족 모용씨와 고구려의 압력으로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힘이 점점 약해져 결국 494년에 왕족이 고구려에 투항하면서 최종 멸망하고 말았다.
부여의 통치 제도
부여의 왕은 무제한의 권력을 행사하는 전제군주가 아니었다. 왕의 권력은 귀족 합의 기구의 제약을 받았다. 왕이 특정 가계 출신 중에서 뽑혔고, 여섯 가축의 이름을 따서 붙인 마가·우가·저가·구가 등 ‘가加’들의 대표로 군림해도 초월적 존재는 되지 못했다. 날씨가 고르지 못해 수해나 한해가 생기고 흉년이 들면 그 허물을 왕에게 돌려 죽이거나 교체한 풍습이 이를 방증한다.
부여는 사출도라는 제도로 지방을 다스렸는데, 수도를 중심으로 사방을 나눈 뒤 중앙은 왕이 다스리고, 네 개의 지역은 제가들이 관할했다. 그리고 수도에서 영고라는 ‘국중대회’를 열어 왕과 제가들이 함께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국가의 중대사를 의논했다. 이때 형옥을 판결하고 죄수를 석방하기도 했고, 풍흉에 따라 왕의 치폐를 결정하기도 했다. 또한 축제 때는 전 부여의 읍락민이 참여해 밤낮으로 음주가무를 즐기며 결속을 도모했다. 부여처럼 전국적인 지배 조직이 미비하고 각 지방 부족들의 자치력이 강한 사회에서 영고는 민속 행사일 뿐만 아니라 통합 기능을 수행한 정치 행사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