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페소아들이 가득한 트렁크를 여는 타부키 문학의 정수 페소아론
평생 페소아를 알리고 연구한 현대문학계의 혜안 타부키가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까지 20여 년간 페소아를 주제로 한 땀 한 땀 써내려갔던 글을 묶은 작가론이자 문학 에세이. 70여 개가 넘는 다른 이름으로 산 기막힌 작가 페소아의 삶과 작품에 관한 매혹적이고 비평적인 통찰이 담긴 글을 비롯해, 부록으로 타부키가 직접 이 책을 위해 가려뽑은 페소아의 주요 편지들과 시가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자신을 문학세계의 신비로 이끈 페소아에 대해 오랫동안 사유하고 질문해온 타부키가 그 신비를 향해 치켜든 인식의 램프이자, 페소아들이 가득한 트렁크를 열기 위해 독자에게 건네는 보조열쇠다.
목차
머리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1
사람들이 가득한 트렁크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5
하나의 삶, 여러 개의 삶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55
알바루 드 캄푸스―형이상학적 공학자 _________________ 71
한 어린이가 풍경을 가로지른다 _______________________ 79
베르나르두 소아르스―불안하고 잠 못 이루는 사람 _____ 87
한 줄기 담배 연기―페소아, 스베보, 그리고 담배 ______ 99
연애편지들에 대해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19
『뱃사람』―난해한 수수께끼? ________________________ 131
『뱃사람』을 번역하면서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39
『파우스트』에 관한 메모 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43
안드레아 찬초토와의 인터뷰 __________________________ 145
부록―이 책에서 중요하게 언급된 페소아의 글들
다른 이름들의 발생에 관해 아돌푸 카사이스 몬테이루에게 보낸 편지 __ 159
『양들의 보호자』 8번 시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75
오펠리아 케이로스에게 보낸 편지 일곱 통 ___________________________ 183
인용문 출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97
안토니오 타부키 연보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99
옮긴이의 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03
저자
안토니오 타부키
출판사리뷰
타부키가 평생 사숙한 페소아 작가론 및 문학비평 에세이
유럽의 지성으로 불리며 죽기 전까지 노벨상에 여러 차례 거론되었던 이탈리아의 걸출한 문인 안토니오 타부키 문학의 중심에는, 포르투갈 작가 페르난두 페소아가 있었다. 타부키는 1960년대에 프랑스 헌책방에서 「담배 가게」라는 시를 읽고 처음 페소아에게 매혹되어, 아직 유럽이 페소아라는 작가에 눈뜨기 전부터 그를 알리고 그의 작품세계를 소개하는 일에 앞장서왔다. 포르투갈 여인 마리아 조제 드 랑카스트르와 결혼해 공동으로 페소아의 작품을 번역하고 연구서를 내는가 하면, 페소아의 삶과 작품을 모태 삼아 자신의 문학세계를 일구기도 했다. 일례로 인도에서 종적을 감춘 사라진 친구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소설 『인도 야상곡』(1984)을 비롯해, 모국어인 이탈리아어가 아니라 포르투갈어로 쓴 소설로 죽은 친구를 만나러 리스본 곳곳을 떠도는 이야기 『레퀴엠』(1991), 페소아가 죽기 사흘 전을 상상하며 쓴 픽션 『페르난두 페소아의 마지막 사흘』(1994) 등 타부키의 주요 작품에서 주인공 화자를 다른 세계로 이끄는 마법 같고 신비로운 존재론의 실마리는 페소아 혹은 그의 숱한 분신들 페소아들이었다.
이 책은 타부키가 쓴 페소아 관련 글들 여러 편과, 이와 관련해 타부키가 직접 가려뽑은 페소아의 핵심 시와 편지들로 구성되어 있다. 페소아와 그의 다른 이름들에 관한 핵심 전기 및 관계 탐구, 여러 연구자의 목소리가 녹아들어간 산문들과 이탈리아 시인 안드레아 찬초토와 나눈 인터뷰, ‘담배’라는 주제 하나로 페소아와 스베보를 묶은 독창적인 에세이, 트렁크에서 나온 희곡과 시 원고들에 대한 단상과 타부키가 작품을 번역하면서 떠오른 메모, 연애편지를 통해 페소아의 의식을 들여다본 분석 등, 타부키의 짧고도 간결한 이 글들은 20여 년간 오랫동안 페소아를 사숙한 타부키의 비평적 통찰의 정수롤 보여준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이 글들이 “페소아의 놀이가 지닌 본질과 그의 진정한 허구”를 탐구한 “하나의 비평적 가설”로 읽히기를 바란다고 썼다. 이 책은 “전기를 위한 작품 창안이 아닌, 작품을 위해 전기를 창안한 작가”이자 “다른 이름들로써 놀이의 본질을 실제로 살아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페소아에게 바치는 타부키의 애정 어린 페소아론이다. 또한 여전히 페소아 원고들 정리가 진행중이고 판본 문제가 여러 연구자들 사이에서 다양하게 거론되고 있는 현 단계에서, 타부키가 자기 글에 인용하고 있는 1980년대까지의 페소아 연구의 진척 과정과 관련 연구자들의 핵심적인 문헌자료 목록을 개관할 있다는 것도 이 책의 미덕이다.
제목에 숨은 비밀: 페소아(사람)들로 가득한 이명들의 은하계를 여행하는 다각도의 접근
그렇다면 이탈리아의 문인 타부키를 이토록 매혹시킨 페소아, 그는 누구인가? 사실 타부키가 이 책에서 여러 각도에서 되묻고 구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질문이다. 한국에는 몇 년 전 『불안의 책』 『페소아와 페소아들』 등이 소개되었다. 그의 픽션 같은 일대기는 숱한 문학인과 예술가에게 영감의 원천이자, 20세기 문학사 내의 자아와 주체에 대한 철학적 문제제기로 이어지기도 했다. 또 오늘날 세계 문학인들은 이렇게 말하곤 한다. 파리에는 보들레르가, 더블린에는 조이스가, 리스본에는 페소아가 있다! 20세기 최대의 서정시인”(잔프랑코 콘티니), “너무나 드문 위대한 시인”(앙드레 브르통), “페소아는 미지의 절박함이다”(옥타비오 파스), “보르헤스를 능가하는 환상적인 창조, 그는 다시 태어난 휘트먼”(해럴드 블룸), “‘책’이라는 말라르메의 기획을 훨씬 넘어선 페소아의 문학세계”(알랭 바디우)라고 떠들기도 했다.
우선 위의 질문에 답하려면 타부키가 뽑은 이 책제목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람들이 가득한 트렁크’라는 제목에서 보듯, 타부키는 포르투갈어로 일반명사로서 ‘사람, 인물’을 뜻하는 소문자 ‘pessoa’와 고유명사로서의 이름 대문자 ‘Pessoa’ 사이의 긴장을 절대 놓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 제목은 ‘페소아들이 가득한 트렁크’라는 메아리와 같이 온다. 그렇다면 왜 트렁크인가? 페소아가 죽고 나서 2만 7500여 장의 원고가 들어 있던 트렁크가 발견되었고, 거기에는 각 글마다 70개가 훌쩍 넘는, 또 혹자는 80여 개라고도 하는, 그의 숱한 다른 이름(異名)들의 세계가 부기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간의 세계문학사에서 이는 유례를 찾기 힘든 문학사적 사건과도 같았다. 이 제목은, 말하자면 무수한 사람들로 살았던 페소아(개인/단수)와 개별적 개성을 지닌 페소아들(이명들/복수)의 신비를 포착해낸 타부키의 비평적 통찰이 녹아들어간 것으로, 이 책 자체가 곧 독자들로 하여금 페소아 세계로 모험을 떠나기를 권하는 여행가방인 셈이다.
유럽의 변방 포르투갈 작가 페소아가 지닌 문학세계의 현대성과 역사성을 진즉에 꿰뚫어본 타부키는, 이 책에서 그의 출현을 ‘20세기 네거티브’ 문학으로 조심스레 분류하면서, 전기적 관점, 정신분석학적 관점, 역사적-철학적 관점 등 다양한 각도에서 페소아를 바라보고 있다. 특히 페소아에 대해 자칫 오해할 수 있을 법한 그의 이데올로기적 입장, 제국주의에 대한 열광이라든가 귀족주의에 대한 공감 등의 문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당시 유럽에 유행하던 예술 운동 및 사조와 포르투갈 내에서 페소아가 이끌었던 아방가르드 운동은 어떤 차이가 있는지에 대해, 시대사와 같이 조명하고 있는 타부키의 고찰은 무척 탁월하다. 그뿐만 아니라 여러 이름으로 공시적 복수성의 삶을 보여준 페소아의 자아분열적 세계관과 명철한 심리적 현실을 대비시킨 통찰이라든가, 영어와 포르투갈어를 번갈아가며 쓴 그의 문학언어와 관련해 찬초토와 나눈 대담이라든가, 말라르메, 발레리, 베케트, 스베보, 몬탈레, 카프카, 무질, 릴케 등의 문학가들과의 비교는, 페소아와 그들이 공명하는 지점을 넘어 독특한 차이를 감별해내도록 이끈다. 박학다식하고 압축적인 사유가 녹아든 타부키의 정제된 문장 역시 독자들로 하여금 페소아 문학세계의 비밀로 이끄는 상상력에 불을 지펴줄 것이다.
타부키가 가려뽑은 페소아 글들과의 만남: 다른 이름들의 발생에 관한 페소아 자신의 고백글, 연애편지, 페소아 문학관을 보여주는 핵심 시가 부록으로 실린 책
무엇보다 이 책을 읽는 재미 중에 놓칠 수 없는 게 또 있다. 바로 타부키가 직접 가려뽑아 부록으로 실은 페소아 원고다. 여기에는 페소아가 자신의 다른 이름인 몬테이루에게 직접 자기 자신의 이명들이 어떻게 발생했는지를 설명하는 핵심 편지 「다른 이름들의 발생에 관해 아돌푸 카사이스 몬테이루에게 보낸 편지」와 더불어, 페소아 시론의 원천에 대해 집중적으로 탐구한 타부키의 글 「한 어린이가 풍경을 가로지른다」와 공명하는 페소아의 시 「양들의 보호자」 8번 시 전문, 그리고 페소아의 내면 고백과 현실과 허구가 뒤섞인 의식이 잘 녹아들어가 있는 연인 오펠리아 케이로스에게 보낸 편지 일곱 통이 실려 있다. 특히 몬테이루에게 보낸 편지에서 페소아는 자기가 쓰는 책들의 장래 출판 계획이나 순서, 자신의 다른 이름들의 기원, 신지학과 신비주의와 관련한 자신의 신학적 의식을 담은 오컬티즘 사상에 관해 직접적으로 해명하고 있어, 현재까지도 원고 정리가 진행중인 단계에서 앞으로 페소아 세계를 항해해나갈 연구자들이나 독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타부키 글에서 소개된 페소아의 희곡작품들(『뱃사람』 『파우스트』 등)과 중간중간 인용된 여러 시편들은, 아직 그의 작품이 단편적으로 소개되어 아쉬워했던 한국 독자들에게는 흥미롭고 입체적인 페소아 문학세계의 윤곽을 그려볼 수 있게 안내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