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역사의 왜곡과 조작 속에서 잊혀간
화려하고 찬란했던 동방의 강국
백제 700년 역사의 진실을 재조명한다!
백제는 ‘망할 수밖에 없었던 나라’였는가
흔히 역사 기록과 일반적인 인식은 백제를 ‘망할 수밖에 없었던 나라’였다고 결론지어놓고 그 이유를 찾는 데 골몰한다. 그리고 그 원흉으로 의자왕을 지목한다. 이것은 과연 진실일까? 실상을 들여다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의자왕 때 역사를 면밀히 살펴보면 흔히 알려진 것처럼 백제가 혼란스러웠다거나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는 증거는 나타나지 않는다. 의자왕이 자만심에 빠져 독선적인 정국 운영으로 위기를 자초했다는 인식도 사실과 다르다. 나당 연합군의 침공에 백강(白江)과 탄현(炭峴)을 막아야 한다는 충신의 충고를 무시했다는 점을 그 대표 사례로 지목하고 있으나 정작 백강에는 백제군이 배치되어 있었다. 계백이 이끈 부대도 결사대로 보기 어렵다. 당시 5,000명은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었으며, 이 부대는 철수 후 백강 방면에 재투입되었다. 결국 백제의 실질적인 멸망은 당이 주둔군 철수를 고려할 정도로 강성했던 백제 부흥운동이 부흥군 내부의 분열로 종말을 고한 그 시점이라고 봐야 한다.
백제는 고구려가 광개토왕비에서 ‘백잔(百殘)’이라는 표현까지 동원하며 강한 증오심을 표출할 만큼 강성한 나라였다. 고대 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고구려와 맞선 나라 백제. 이 책은 그 역사적 진실을 복원하고자 하는 소중한 시도다.
목차
들어가며
제26대 성왕
제27대 위덕왕
제28대 혜왕
제29대 법왕
제30대 무왕
제31대 의자왕
저자
이희진
출판사리뷰
왕대별 테마! 시대별 핵심!
굵직한 사건을 정사 중심으로 서술한 한국사의 맥!
▶ 문고본 최초로 시도되는 한국사 왕조실록 시리즈, 그 세 번째!
『백제왕조실록』 1·2권 출간!
살림출판사에서는 지난 13년간 문·사·철을 중심으로 한 인문학과, 과학기술·예술·실용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살림지식총서≫를 500종 이상 출간했다.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대표 문고’임을 자처하는 ≪살림지식총서≫가 이번에는 ‘한국사 왕조실록 시리즈(전 19권)’를 준비했다. 문고본으로서는 최초로 시도되는 기획이다.
‘한국사 왕조실록 시리즈’는 고조선에서부터 대한제국까지 반만 년을 지속한 한국사의 맥을 왕대별로 묶었다. 여기에 중국의 황하문명보다 2000년 이상 앞서고 고조선의 흔적이 많이 발견되는 요하문명도 포함시켰다. 이는 동북공정으로 역사를 왜곡하려는 중국에 대항할 역사관을 심어주고자 한 것이다.
이 가운데 『조선왕조실록』(전 6권)을 2015년에 첫 번째로 선보였고, 2016년 고대사 편인 『고구려왕조실록』(전 2권)을 두 번째로, 이어서 이 책 『백제왕조실록』(전 2권)을 세 번째로 펴낸다.
왜곡과 조작으로부터 복원해야 할 백제의 역사
백제는 동아시아의 강대국 고구려와 수백 년 동안 대등하게 맞선 나라였다. 그처럼 강대한 국력과 찬란한 문화를 자랑했음에도 백제는 실제 위상에 걸맞은 평가를 제대로 받아오지 못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사료와 오늘날의 연구 성과가 왜곡·조작으로 얼룩진 혐의가 짙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백제사 전반을 보여주는 유일한 자료인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에 중요한 업적을 남긴 백제 왕들에 대한 기록이 결정적인 시기마다 대거 빠져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는 『삼국사기』가 신라 위주로 서술되었다는 비판과 맥이 닿는 대목이다. 아울러 또 하나의 참고 사료인 『일본서기(日本書紀)』는 황당할 정도로 신뢰할 수 없는 기록투성이다. 일본의 이른바 ‘황국사관(皇國史觀)’이 낳은 역사 왜곡의 대표 자료로서, 훗날 일제의 ‘식민사관(植民史觀)’에서 한국사의 주체성과 정통성을 부정하는 근거로 악용되었다.
임나일본부의 진실은?
저자는 이 책에서 그러한 오류와 오해를 바로잡고 제대로 된 백제의 진면목을 복원하고자 한다. 그 한 예가 369년(근초고왕 24) 백제 근초고왕이 왜와 연합하여 가야 지역을 평정한 사실이다. 이 사건은 당시 백제와 왜의 위상, 가야에 대한 백제의 영향력, 특히 임나(任那)와 일본부(日本府)의 실체를 규명하고, 4세기 동아시아 국제관계를 해명하는 일에서 핵심 열쇠가 된다.
그런데 의미심장하게도 『삼국사기』에는 이 중요한 일이 아예 기록에서 빠져 있다. 또 『일본서기』는 이 일이 왜의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근초고왕은 하수인 정도였다고 폄훼한다. 그러나 실상은 정반대였다. 근초고왕 대 백제는 왜와 가야를 끌어들여 반고구려 연합 세력을 형성하고 마한을 통합하는 등 전성기를 구가하면서, 동아시아 국제관계를 주도한 강성한 나라였다. 임나와 일본부는 그 과정의 한 부산물이었으며, 이 점은 6세기 성왕 대에 단행한 ‘임나재건’ 시도에서 재차 확인된다.
백제는 ‘망할 수밖에 없었던 나라’였는가
흔히 역사 기록과 일반적인 인식은 백제를 ‘망할 수밖에 없었던 나라’였다고 결론지어놓고 그 이유를 찾는 데 골몰한다. 그리고 그 원흉으로 의자왕을 지목한다. 이것은 과연 진실일까? 실상을 들여다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의자왕 때 역사를 면밀히 살펴보면 흔히 알려진 것처럼 백제가 혼란스러웠다거나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는 증거는 나타나지 않는다. 의자왕이 자만심에 빠져 독선적인 정국 운영으로 위기를 자초했다는 인식도 사실과 다르다. 나당 연합군의 침공에 백강(白江)과 탄현(炭峴)을 막아야 한다는 충신의 충고를 무시했다는 점을 그 대표 사례로 지목하고 있으나 정작 백강에는 백제군이 배치되어 있었다. 계백이 이끈 부대도 결사대로 보기 어렵다. 당시 5,000명은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었으며, 이 부대는 철수 후 백강 방면에 재투입되었다. 결국 백제의 실질적인 멸망은 당이 주둔군 철수를 고려할 정도로 강성했던 백제 부흥운동이 부흥군 내부의 분열로 종말을 고한 그 시점이라고 봐야 한다.
백제는 고구려가 광개토왕비에서 ‘백잔(百殘)’이라는 표현까지 동원하며 강한 증오심을 표출할 만큼 강성한 나라였다. 고대 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고구려와 맞선 나라 백제. 이 책은 그 역사적 진실을 복원하고자 하는 소중한 시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