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문화의 변방 터키에서 고전을 통해 독학으로 소설을 써 온
노벨상 수상 작가 오르한 파묵이 들려주는 소설 창작의 비밀
『소설과 소설가』는 현대 터키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오르한 파묵이 소설을 읽으면서 소설을 공부하고 마침내 세계적인 소설가로 성장하기까지의 여정을 그린 강연록이다. 그는 2008년 가을, 하버드 대학의 찰스 엘리엇 노턴 강연에 초청받아 여섯 차례의 강연을 통해 35년 동안 소설에 매진해 온 자신의 문학 여정을 털어 놓는다. 촉망받던 화가 지망생이 세계적인 소설가로 거듭나기까지 어떤 예술적 한계에 부딪혔는지, 어떻게 싸우고 어떻게 매달렸는지, 이론보다는 개인적인 성찰의 목소리로 전달한다.
파묵은 독학으로 소설 쓰기를 공부했다. 열여덟 살에서 서른 살까지, 가족들이 걱정할 정도로 집 안에만 틀어박혀 소설 읽기를 통해 소설 쓰기를 공부했다. 도스토옙스키, 토마스 만, 제임스 조이스, 마르셀 프루스트, 윌리엄 포크너 등 위대한 작가들의 소설을 읽으면서, 그는 “옛날 표현을 빌리자면, ‘나의 목소리’를” 찾게 되었다.
그는 ‘노턴 강연’을 준비하면서 지난 35년 동안의 문학 여정을 그려 보고, 소설을 읽고 또 쓰면서 느끼고 깨닫게 된 소설 이론을 정리한다. 그리고 그는 “‘소박한’ 동시에 ‘성찰적인’ 영혼을” 가진 소설가가 되기 위해 계속 읽고 또 써 나갈 것을 다짐한다. 새로운 여행을 앞두고 지난 여행을 정리하는 이의 마음으로, 그는 그동안의 여정을 세밀하게 그려낸다.
목차
1 소설을 읽을 때 우리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까?
2 파묵 씨, 당신은 이런 것들을 정말로 경험했나요?
3 소설의 캐릭터, 플롯, 시간
4 단어, 그림, 사물
5 박물관과 소설
6 중심부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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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오르한 파묵
출판사리뷰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오르한 파묵의 하버드대 강연록 『소설과 소설가(The Naive and the Sentimental Novelist)』가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2008년 가을, 오르한 파묵은 하버드 대학의 ‘찰스 엘리엇 노턴’ 강연에 초청받는다. 이는 호르헤 보르헤스, 이탈로 칼비노, 움베르토 에코 등이 강단에 섰던 유서 깊은 강연이다. 파묵은 여섯 차례의 노턴 강연을 통해 35년 동안 소설에 매진해 온 자신의 문학 여정을 털어놓는다. 촉망받던 화가 지망생이 소설을 통해 난생처음 자유의 감각을 느끼고 홀로 작가의 꿈을 키우기 시작해, 사실주의와 모더니즘을 오가며 좌충우돌하는 시기를 거쳐 마침내 세계적인 작가로 우뚝 서기까지, 소설을 통해 인생을 배우고 인생을 개척한 한 남자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나의 소설 여행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어떤 정거장에 들렀는지, 소설 형식과 예술이 내게 무엇을 가르쳐 주었는지, 내가 어떤 예술적 한계에 부딪쳤는지, 또 어떻게 싸우고 어떻게 매달렸는지, 이론적 측면이 아니라 개인적인 모험으로써 설명하고 싶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소설 예술에 관해 숙고할 계기를 제공하는 일종의 논문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이 책은 내가 소설에 대해 아는 것들과 배운 것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총체입니다. 나에게 소설에서 가장 중요해 보이는 것들을 간략하게 정리했습니다.(176쪽)
이 책의 원제 ‘The Naive and the Sentimental Novelist’는 프리드리히 실러의 “?ber naive und sentimentalische Dichtung”이라는 논문에서 따온 것이다. 이 논문은 국내에서 「소박 문학과 감상 문학」, 「소박한 문학과 성찰적인 문학」, 「소박한 문학과 감상적인 문학에 관하여」 등으로 번역되었고, 이 책에서도 「소박한 문학과 성찰적인 문학」으로 번역했다. 실러의 논문에 따라, 파묵은 소설의 기교를 인식하지 않고, 즉 소설을 쓰는(읽는) 데에 인위적인 면이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으면 ‘소박한’ 작가(독자)로 규정하고, 반대로 소설을 읽거나 쓸 때, 소설에 사용된 기법과 독서 과정에서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두면 ‘성찰적인’ 작가(독자)라 규정한다. 한국어 제목을 ‘소설과 소설가’로 붙인 것은, 이 책에 파묵이 소설을 읽으면서 소설을 공부하고 마침내 세계적인 소설가로 성장하기까지의 여정이 잘 드러나 있을 뿐 아니라,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포크너, 조이스, 보르헤스 등 위대한 소설가들의 소설을 통해 소설의 안과 밖을 해부하고 소설 이론을 풀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화가 지망생이었던 청년이 세계적인 작가가 되고 노벨 문학상을 받기까지
“파묵 씨, 당신은 ‘소박한’ 소설가입니까, 아니면 ‘성찰적인’ 소설가입니까?”
오르한 파묵은 일곱 살부터 스물두 살까지 화가를 꿈꾸었다. 자전 에세이 『이스탄불』에도 나와 있듯이, 그는 대가족 속에서 성장하면서 가족과 주위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더욱 그림에 몰두했다. 특히 두 살 위인 형은 소문난 수재였기에 학업으로는 그와 경쟁할 수 없었던 이유도 있었다. 그러다 그는 스물세 살에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가족의 결정에 따라, 그리고 할아버지나 아버지나 삼촌처럼, 공과대학에 들어가 건축학을 공부하고 있었지만, 학교마저 그만두고 틀어박혀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화가가 되겠다고 했을 때도 “이 나라에서는 아무도 자신이 그린 그림을 팔아서 먹고살 수 없다. 넌 비참하게 살 것이고, 무시당할 것이고, 평생을 콤플렉스와 불안에 싸여 예민한 상태로 살아갈 거야.”라고 했던 가족들은, 소설가가 되겠다는 그에게 “오르한, 사람은 스물두 살 때 인생을 알 수 없단다. 나이를 좀 먹고 인생을, 사람들을, 세상을 경험해 봐. 그런 다음에 소설을 써!”라고 했다. 그리고 그가 소설 한 권을 쓰고 나면 다시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한’ 생활로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파묵은 그들에게 “소설은 우리가 인생을, 사람을 알기 때문에 쓰는 게 아니에요. 다른 소설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고 그와 같은 방식으로 써 보고 싶기 때문에 쓰는 거라고요!”라고 말하고 싶었다고 한다. 결국 그는 그렇게 소설을 읽고 쓰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여덟 편의 장편소설을 발표하고 노벨 문학상을 비롯한 전 세계 유수의 문학상을 휩쓴 소설가가 되었다.
파묵은 그림을 그리는 것과 소설을 쓰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음을 인지하고, “소설은 오로지 이성으로 쓰고, 그림은 오로지 재능으로 그리는 것 같습니다.”라고 밝힌다. 즉 그림을 그릴 때는 더 천진하고 소박하며, 소설을 쓸 때는 더 성숙하고 성찰적이라고 느낀다는 것이다. 그림을 그릴 때는 손이 이끄는 대로 선을 긋고 색을 칠한 후에야 이성이 그것을 이해하지만, 소설을 쓸 때는 이성의 힘에 보다 더 이끌리는 자신을 느낀다고 그는 이야기한다. 그러나 일곱 살부터 화가를 꿈꿔 왔던 파묵이기에, 그는 소설을 쓸 때도 사건과 장면을 ‘그림’처럼 묘사하곤 한다. 소설 속에서 그림을 그릴 때의 습관이 발견되는 것이다. 이는 “단어들로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라는 말로 잘 설명될 수 있다.
파묵은 독학으로 소설 쓰기를 공부했다. 그는 열여덟 살에서 서른 살까지, 특히 대학을 자퇴한 후에는 가족들이 걱정할 정도로 집 안에만 틀어박혀 책을 읽었다.(“소년은 소설가가 되리라 결심하고 아버지의 불 꺼진 서재를 더듬어 빼낸 책을 닥치는 대로 읽어 나갔지요.”) 소설 읽기를 통해 소설 쓰기를 공부했던 것이다.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토마스 만, 제임스 조이스, 마르셀 프루스트, 윌리엄 포크너 등 위대한 작가들의 소설을 읽으면서, 그는 “옛날 표현을 빌리자면, ‘나의 목소리’를” 찾게 되었다. 그는 특히 “이 세상 모든 소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소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완벽한 소설”이라고 여기는 『안나 카레니나』를 통해 소설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고 자신만의 소설 이론, 소설 작법을 구축해 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열여덟 살에서 서른 살 사이에, 소설을 아주 열심히 읽었습니다. 이스탄불에 있는 내 방에서 밤을 새워 가며 읽었던 모든 소설은 나에게 우주를 선사해 주었습니다. 그 우주는 백과사전이나 박물관 못지않게 인생의 모든 면을 세세히 알려 주었고, 나의 삶 못지않게 인간적이었으며, 오로지 철학이나 종교에서나 발견할 수 있을 심오하고 포괄적인 바람, 위로 그리고 약속 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나는 세계의 본질을 알고, 인간적으로 성숙해지고, 내 정신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꿈속에 잠긴 기분으로 다른 모든 것을 잊고 소설을 읽곤 했습니다.(34쪽)
그는 ‘노턴 강연’을 준비하면서 지난 35년 동안의 문학 여정을 그려 보고, 소설을 읽고 또 쓰면서 느끼고 깨닫게 된 소설 이론을 정리한다. 그리고 그는 “‘소박한’ 동시에 ‘성찰적인’ 영혼을” 가진 소설가가 되기 위해 계속 읽고 또 써 나갈 것을 다짐한다. “오랜 여행에서 돌아와 다시 새로운 여행을 앞둔 사람처럼, 그동안의 여정에 관해 얘기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노벨상 수상 작가 오르한 파묵이 들려주는 소설 창작의 비밀
“어쩌면 지금 나는 직업상의 비밀을 너무 많이 털어놓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작가협회에서 제명당할지도 모르겠군요!”
ㆍ 『내 이름은 빨강』 속 색깔들이 말을 하기 시작한 이유
『내 이름은 빨강』에서는 그림 속 주인공들뿐만 아니라, 색과 사물 들까지 말을 하도록 했는데, 나는 어떤 세계(그림을 통해 설명하고 다시 구성하고 싶었던)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독자들 역시 그곳으로 끌어들일 수 있음을 느꼈습니다. 우리에게 과거는 옛 건축물이거나 옛 텍스트거나 옛 그림입니다. 굳이 글이 아니라 그림에서 출발하더라도 소설을 위해 필요한 밀도로 과거를 상상할 수 있다고 믿었기에 나는 이스탄불 톱카프 궁전 보물창고에 보관된 16세기 말 책과 고문서 들 속에 있는 그림들을(대부분 오늘날의 이란이나 아프가니스탄에서 생산된) 세세하게 묘사하고, 나 자신을 이 세밀화 속 영웅, 사물, 심지어는 악마와도 동일시함으로써 어떤 세계를 재현해 보려 시도했습니다.
ㆍ 나보코프가 찾아낸 『안나 카레니나』의 치명적인 오류
나보코프가 (자신이 톨스토이보다 더 영리하다는 희열을 만끽하며) 지적한 바에 따르면, 『안나 카레니나』는 주인공 개개인의 이야기에는 실수가 거의 없지만, 공통의 객관적 시간이 제대로 구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주인공들의 달력들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이지요. 만약 꼼꼼한 편집자가 있었다면 소설에 이런 연대기적 실수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겁니다. 소설에 푹 빠져서 읽는 독자들은 톨스토이의 달력이 옳다고 생각하며 읽기 때문에 소설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작가와 독자가 이런 실수를 하는 것은 소설을 주인공들의 시간에 초점을 맞춰 쓰고 읽는 습관 때문입니다.
ㆍ 도스토옙스키의 『악령』이 걸작으로 거듭난 것은 간질병 때문이다?
도스토옙스키는 1870년 7월에, 그러니까 처음 『악령』의 착상을 얻고 집필에 들어간 지 1년이 지나서 간질병 발작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 후 도스토옙스키는 조카인 소피야 이바노바에게 편지를 쓰는데요, 이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갑자기 소설의 문제가 무엇인지, 어디서 실수를 했는지 보게 되었다. 영감과 함께 저절로, 모든 차원과 함께 한순간에 새로운 계획이 내 앞에 나타났다. 모든 것을 뿌리째 바꿔야만 했어. 잠시도 주저하지 않았지. 지금까지 쓴 것을 전부 내팽개치고, 첫 페이지부터 다시 시작했다. 내가 1년간 기울인 모든 노력이 사라지고 말았어.”
ㆍ 톨스토이가 대화 도중 무심코 노출한 소설 창작의 비결
톨스토이가 대화 도중에 아주 단순한 공식을 언급했다는 얘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만약 어떤 소설에서 주인공이 지나치게 악한 사람이라면 약간 선한 면을 더해야 한다. 만약 지나치게 좋은 사람이라면 약간 나쁜 면을 더해야 한다.” 나 역시 같은 소박한 태도로 이와 비슷한 무언가를 말하고 싶습니다. 만약 소설을 쓰다가 중심부가 아주 명확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나는 그것을 약간 감춥니다. 반대로, 중심부가 너무 깊숙하게 감춰져 있으면 약간 드러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ㆍ 실러가 말하는 ‘소박한’ 작가, ‘성찰적인’ 작가
ㆍ 소설을 읽을 때 우리 머릿속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나
ㆍ 위대한 작가들이 소설을 쓸 때 가장 먼저 하는 일
ㆍ 소설은 어디까지가 경험이고, 어디까지가 상상일까
ㆍ 소설은 어떻게 전 세계에서 지배적인 문학 형식이 되었나
ㆍ 150년 동안 문학 비평가들이 외면해 온 소설의 ‘중심부’란 무엇인가
내용 요약
1. 소설을 읽을 때 우리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까?
프리드리히 실러의 논문 「소박한 문학과 성찰적인 문학(?ber naive und sentimentalische Dichtung)」를 예로 들면서 소박한 작가(독자), 성찰적인 작가(독자)를 설명한다. 소설 창작은 소박한 동시에 성찰적인 일로, “소박한 면이(천진하고 즐겁고 쉽게 동일화되는) 성찰적인 면과(자신의 목소리를 자각하고 소설 기법에 대해 고민하느라 분주한)” 뒤섞여 일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을 읽을 때 머릿속에서는 아홉 가지 일어난다. 1. 전체 풍경을 보면서 이야기를 따라가고, 어딘가에 있을 모티프와 아이디어, 의도, 중심부를 찾는다. 2. 머릿속에서 단어를 그림으로 전환하여 책이 말하는 것(즉 서술자가 말하고 싶어 하거나 말하는 것, 말했다고 추측되는 것)을 추적해 간다. 3. 독자는 소설 속 이야기가 작가의 경험인지 상상인지를 궁금해하고, 드디어 소설 속 세계의 복잡한 차원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서로 모순돼 보이는 것들도 독자들은 받아들이게 된다. 4. 독자는 ‘현실도 이럴까?’, ‘소설에서 설명하고, 보여 주고, 묘사한 것들이 실제 삶 속에서와 같을까?’를 궁금해 한다. 5. 단어와 비유와 문장에 숨어 있는 음악을 음미한다. 6. 주인공의 선택과 행동에 대해 도덕적 판단을 내리고, 주인공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통해 작가를 판단한다. 7. 얼마나 깊은 이해에 도달했는지를 생각하며 작가와 공범 관계를 형성한다. 8. 읽은 것들을 떠올리면서 작가가 보여 주는 의미와 독서의 즐거움을 찾기 위해 소설의 감춰진 중심부를 찾기 시작한다. 9. 최대한 주의를 기울여 소설의 감춰진 중심부를 찾는다. 소박하게 무의식적으로, 동시에 성찰하면서 의도적으로 독자들은 소설을 읽으면서 이런 과정을 거치고, 궁극적으로 소설의 중심부를 향해 걸어가게 된다.
2. 파묵 씨, 당신은 이러한 것들을 정말로 경험했나요?
“서로 모순되는 사고들을 우리가 불안감을 느끼지 않고 동시에 믿고, 동시에 이해하게 만드는 특별한 구조”인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작가의 존재를 잊고, 소설이 작가에 의해 창작되었다는 것을 잊게 된다. 또한 작가를 잊는 순간, 소설 속 세계가 실재라고 믿게 된다. 혹은, 독자는 현실과 상상을 혼동하기 위해 소설을 읽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것이 실제가 아님을 알고 있다. “가장 소박한 작가에서 가장 성찰적인 독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소설을 쓰거나 읽는 사람이라면 모두, 마음 한구석에서 소설이란 이 아찔하고 모호한 느낌 때문에 읽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고, 작가와 독자가 허구에 대해 다르게 인식하기 때문에 소설 예술은 살아남을 수 있다. 즉, 소설이란 논리적인 세계에서 벗어나, 상상을 통해 자유롭게 모든 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인간의 열망에 호소하는 예술인 것이다.
3. 소설의 캐릭터, 플롯, 시간
캐릭터라는 개념은 19세기부터 본격적으로 발전하여 중요성이 부각되었고, 그 시작은 셰익스피어였다. 셰익스피어는 오랫동안 일차원적으로 고정되어 있던 캐릭터들이 그 틀에서 벗어나게 했다. 근대 소설에서는 캐릭터들이 플롯과 배경, 주제 등 소설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캐릭터가 배경과 사건에 어떻게 녹아 들어갔느냐가 좀 더 결정적인 문제이다. 플롯은 작가가 풀어놓고자 하는 상황들을 연결하는 선이자, 나뉠 수 없는 크고 작은 단위들을 합친 선이다. 플롯은 서사 구조 또는 사건의 연속 또는 이야기라고도 부를 수 있다. 캐릭터들이 플롯 속에서 움직이는 소설의 시간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한 것처럼 객관적이지도 않고 일직선도 아니”며, 소설 속에는 인물들의 주관적인 시간만이 존재한다. 소설 주인공의 ‘캐릭터’는 플롯과 시간이 만들어 내는 소설의 ‘풍경’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4. 단어, 그림, 사물
소설이 주는 메시지는 언어적이며 ‘단어적’이다. 소설은 시각적 문학이지만, 단어를 머릿속에서 그림으로 전환하여 이해하게 된다. 세상의 풍경 말고도 냄새와 소리, 맛과 감촉까지 단어로 묘사하고, 그 단어를 시각적으로 떠올리게 한다. 소설가는 “단어로 그림을 그린다.” 소설가는 플로베르가 글을 쓸 때 모색했던 것처럼 ‘가장 적절한 단어(le mot juste)’를 찾고, 동시에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적절한 심상(l’image juste)’도 떠올린다. 소설을 읽는 독자는, 그림을 감상할 때와는 달리 그 속으로 들어가고자 하며, 상상력을 동원해 단어를 이미지화한다. 작가가 이런 식으로 만들어 내는 소설 속 풍경은 우리 주위에 있는 일상 속 사물로 이루어지고, 이 사물은 인물의 심리 상태를 반영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사건과 사물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소설 전체를 구성하고 소설 속 세계를 완성하는 요소이다.
5. 박물관과 소설
1. 자존감
박물관이 사물을 보존하듯, 소설은 평범한 생각과 이성의 불연속성을 구어로 표현함으로써 언어의 묘미와 색과 냄새를 보존한다. 소설은 단어, 표현, 관용구만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일상 대화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도 기록한다. 또한 박물관처럼, 소설은 생각을 일깨우기보다는 간직하고 보존하며 잊히는 것에 저항하는 데 중점을 둔다. 그러나 소설은 사물 자체가 아니라, 사물과 우리의 지각이 만나는 순간을 보존한다. 색깔, 소리, 말, 풍경이 우리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기록하고, 일정 기간 동안 보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단순히 자신에게 속한 사물들뿐 아니라, 경험과 삶이 소설에 기록되어 보존된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2. ‘차별화되는’ 느낌
어떤 소설가는 사람들에게 이해받는 데에 자부심을 느끼고, 어떤 소설가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데에 자부심을 느낀다. 즉, 소설을 쓸 때 작가는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려 하는 동시에, 소설의 중심부를 교묘하고 노련하게 감춘 채 암시만 던져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설가는 세상을 다른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서, 동시에 자신만의 세계관을 표현하려 하게 된다.
3. 정치
소설에서 정치를 어디까지 끌어들이느냐 하는 문제에 한계는 없다. 소설가는 자신과는 다른 사람들, 즉 다른 공동체, 인종, 문화, 계층, 민족에 속한 사람들을 이해하려는 그 노력 때문에 정치적이 된다. 가장 정치적인 소설은 전혀 정치적 주제나 동기가 없지만,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을 이해하여, 가장 거대한 전체를 구성하려는 소설이다.
6. 중심부
중심부는 삶에 관한 심오한 관점, 일종의 통찰이다. 깊은 곳에 있는 실재 또는 상상의 신비로운 어떤 지점인 것이다. 소설가들은 이 지점을 탐색하고 그곳이 함축하는 바를 찾아내기 위해 소설을 쓴다. 독자들은 감춰진 심오한 의미, 즉 중심부를 찾기 위해 소설을 읽는다. 소설의 중심부와 의미는 독자에 따라 변하므로, 중심부에(보르헤스는 주제라고 부르는) 대해 논하는 것은 인생관에 대해 논하는 것이다. 순문학의 중심부는 명확하지 않으며, 하나 이상일 수도 있다. 독자들은, 소설가가 플롯과 시간 속에 단어로 그려 놓은 풍경을 헤치고, 그것을 시각화하여여, 중심부를 찾아간다. 소설 읽기란 세상에 중심부가 있다는 것을 믿는 노력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