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새로운 동아시아적 역사상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일본인 한국사 연구자 미야지마 히로시 교수의 문제작
일본인 한국사 연구자로서 양국 역사인식의 차이와 오해를 해소하고 규명하는 데 진력해온 미야지마 히로시(宮嶋博史) 성균관대 동아시아 학술원 교수의 새 저서 『일본의 역사관을 비판한다』는 그간 저자의 주된 연구주제였던 조선경제사, 소농사회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일본의 역사인식 문제를 집중조명한다. 일본인의 자국 역사 인식의 모호점을 명확히 하고 그 오해의 기원을 추적하는 작업은 일본사와 불가분의 관계로, 오랜 시간 일본사의 비교대상이었던 한국사 인식을 바로잡는 데 긴요할 뿐 아니라, 전쟁과 폭력으로 얼룩진 동아시아 근현대사의 기원을 성찰하는 시원(始原)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19세기 서구 근대문물 수용기에 일본은 어떻게 스스로를 주변 동아시아 국가들과 차별화했으며, 그 차별화의 기원은 무엇인가. 이는 역사서술에서 어떤 논리로 합리화되었고, 앞으로 일본의 역사인식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이러한 논의로 출발한 이번 저서의 문제의식은 영토분쟁과 패권다툼이 끊이지 않는 불안한 동아시아 현실에서 평화공존의 길에 대한 참다운 모색으로 이어진다. 사료를 면밀하게 분석하고 역사의 당대적 의미와 현재적 의미를 긴밀하게 엮어냄으로써 오늘의 현실이 곧 역사임을 일깨우는 이 저서는 현실과의 긴장관계를 놓치지 않는 저자의 특유의 저력을 실감케 해준다.
목차
서문
제1부 일본의 봉건제론과 탈아적 일본사 인식
제1장 일본 국사의 성립과 한국사 인식: 봉건제"론을 중심으로
제2장 식민지기 일본과 한국에서의 봉건제론
제3장 한일 고등학교 역사교육의 세계사 인식과 봉건제론
제4장 봉건제와 feudalism의 사이: 인문학과 정치학의 대화를 위해
제5장 근세일본의 조선인식: 임진왜란의 기억을 중심으로
제1부 주
제2부 일본의 동아시아 인식
제6장 평화의 시각에서 다시 보는 일본 근세화: 탈아적 역사이해 비판
제7장 일본사 인식의 패러다임 전환을 위하여: 한일병합100주년에 즈음하여
제8장 한국사 인식의 함정
제9장 방법으로서의 동아시아를 다시 생각한다
제10장 일본 동아시아공동체론의 현주소
제11장 후꾸자와 유끼찌의 유교인식
제2부 주
원문출처 및 집필경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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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미야지마 히로시
출판사리뷰
일본의 왜곡된 역사인식의 뿌리는 무엇인가
제1부에서는 일본‘봉건제’론의 형성과정과 그것이 탈아적(脫亞的) 역사인식에 미친 영향, 그 상관성을 조명한다. 널리 알려졌듯이 일본은 19세기에 서구적 근대화를 선취한 나라로서 자국사와 유럽사의 유사성을 크게 앞세워왔다. 이 유럽사적 발전단계와의 유사성을 ‘입증’하는 키워드가 일본‘봉건제’론으로, 고대중국의 봉건제(封建制) 개념과 달리 일본에 서구적 feudalism의 의미로서 ‘봉건제’가 존재했다는 것이 일본‘봉건제’론이다. 이 ‘봉건제’의 존재를 바탕으로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우위를 주창하는 논리는 한국과 중국 등 동아시아 침략과 지배를 합리화하는 근거로 작동했다. 나아가 이는 2차대전 패전 후 지금까지 전쟁책임에 대한 근본적 반성을 하지 못하는 뿌리이기도 하다는 것이 1부의 문제의식이다.
제1장 일본 ‘국사’의 성립과 한국사 인식은 먼저 일본에서 ‘국사(國史)’라는 개념을 성립시켜 국가정통성을 확보하는 작업이 메이지유신(1868) 이후 러일전쟁을 전후해 비로소 이루어졌음을 밝힌다. 그 주축을 이룬 개념이 천황제와 봉건제이며, 천황제는 일본의 독자성의 상징으로, 봉건제는 일본사와 유럽사의 유사성의 상징이자 한국사·중국사와의 차이의 근거로 자리잡는다. 이러한 일본의 ‘국사’이데올로기는 ‘봉건제 부재=근대화능력 부재’라는 도식을 낳았고, 이는 동아시아 침략의 논리로 작동했던 것이다. 제2장 식민지기 일본과 한국에서의 ‘봉건제’론은 1장에서 형성과정을 살펴본 ‘봉건제’론이 1910~45년 동안 한일 역사학계에 미친 영향을 탐구한다. 이 시기는 일본에서는 ‘봉건제’론이 통설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했으며, 한편으로는 일본을 통해 서구와 근대의 영향을 받아들인 한국사에서도 조선‘봉건제’론 주장이 등장한 때이다. 여기서는 일본사의 보편성(봉건제)을 강조하고 천황제를 비판해 전후 일본사 연구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이시모다 쇼오(石母田正)의 『중세적 세계의 형성』과 백남운의 조선‘봉건제’ 연구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유럽사를 보편적 세계사로 파악하고 자국사의 흐름을 그에 맞춰 인식했다는 점에서 둘은 공통적인 한계를 지닌다. 이시모다 쇼오가 전후 천황제의 한계를 절감하고 그것을 비판하여 일본사의 보편성을 강조한 한계를 지닌다면, 백남운의 연구는 세계사 발전의 5단계를 설정하는 맑스주의의 이론적 도식에 맞춰 한국사를 해석함으로써 역사적 실상을 파악하는 대신, ‘아시아적 봉건제’라는 개념 창출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이런 흐름은 전후 일본사와 한국사 연구에서 모두 ‘봉건제’의 존재를 확고한 주류로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유럽중심주의의 한계가 드러나고 유럽적 근대의 극복을 주장하는 오늘날, 이런 역사인식은 근본적으로 재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제3장 한일 고등학교 역사교육의 세계사 인식과 ‘봉건제’론은 오늘날 한일 양국의 젊은 세대가 어떤 역사를 배우고 있는가를 탐색한다. 한일 양국의 고등학교 국사·세계사 교과서의 차례와 구성, 각 단원의 내용을 차례로 분석해 양국 모두의 역사교육에서 유럽의 ‘봉건제’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밝힌다. 봉건제의 강조로 유럽사가 특권화되면서 그외 지역의 역사는 증발하거나 축소되어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자국사의 독자성을 강조하면서도 고대·중세·근세·근대의 틀을 따르다보니 세계사와 자국사의 부정합(不整合)이 생겨난다. 무엇보다 중세·근세라는 시대구분이 세계적으로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인지, 그렇다면 그 근거는 무엇인지에 대한 성찰이 부재한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봉건제’라는 개념은 처음에 어떻게 수용되고 변화했는가. 제4장 봉건제와 feudalism의 사이는 19~20세기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외래어 수용과 번역의 과정에서 봉건제를 수용하는 한중일 삼국을 비교사적으로 조명한다. 19세기 이전에 한중일 삼국이 공유한 고전적 의미의 봉건제는 중국 고대, 이른바 삼대(三代, 하·은·주夏·殷·周 삼대이지만 실제로는 서주西周시대)의 이상적인 통치체제를 가리키는 개념이다. 그러다 19세기 후반 급격한 문호개방이 이루어지면서 봉건제는 새로운 국가구상과 관련해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일본에서는 자국의 봉건적 체제를 극복하기 위해 군현제가 각광을 받았고, 중국에서는 군현제의 결함을 보완하기 위해 봉건제 주장이 힘을 얻었다. 원래 군현제가 존재하던 한국에서는 군현제 강화를 시대적 과제로 인식해 봉건제 주장이 등장하지 못했다. 20세기에 들면 양상은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서구의 feudalism이라는 말이 ‘봉건제’로 번역됨에 따라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봉건 개념은 포기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런 변화과정을 살펴보면 토꾸가와(德川)시대 일본‘봉건제’의 존재라는 이론은 20세기의 산물로, 그 시대의 필요에 따른 하나의 담론일 뿐이다. 그런데도 오늘날 한국의 세계사 교육에도 일본‘봉건제’론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제5장 근세일본의 조선인식은 임진왜란에 대한 조선과 일본 양국의 역사 기록방식의 차이를 통해 뿌리깊은 일본의 정한론(征韓論)의 배경을 조명한다. 일본에서는 근세의 기점이라 불리는 토요또미정권의 성립(1585)과 근대 일본의 시작이라는 메이지유신(1868)을 전후해 공통적으로 정한론이 등장했다. 이는 잘 알다시피 임진왜란 이후 일제의 조선 침략과 식민지화를 낳았다. 임진왜란에 대한 평가, 조선에 대한 인식이 근대까지 이어진 것이다. 그 근원에는 일본의 임진왜란에 대한 긍정적 인식과 평가가 자리한다. 조선의 역사기록은, 유성룡의 『징비록』에서 보듯 임진왜란의 교훈을 얻기 위해 조선군의 패배와 내부의 혼란 등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다. 이에 비해 일본은 공식 역사기록이 매우 드물고, 그나마 기록 대부분이 마치 승리한 전쟁처럼 묘사되어 있다. 전쟁의 참상과 실패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부재하며, 이런 기록의 축적이 승리의 기억으로 남아 근대 이후 다시 한국에 대한 침략정책으로 이어지게 되었음을 지적한다.
유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 왜곡된 동아시아 상의 근원
2부에는 일본의 ‘근세’ 인식과 동아시아 인식을 ‘유교’라는 키워드를 통해 비판적으로 검토한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 일본 역사학잡지와 국내 잡지들에 게재해 반향을 일으킨 논쟁적인 글들이다. 유교를 키워드로 한 것은 유교에 대한 그릇된 인식이 일본을 한국이나 중국보다 높이 평가하려는 일본의 역사연구자와 국민의 인식에 근본을 이룬다고 파악하기 때문이다. 서구적 근대화를 최우선과제로 삼은 시기 일본에서 유교는 오래된 사상, 보수적이고 체제유지를 위한 사상, 근대화를 위해서는 먼저 극복해야 할 사상 등의 이미지로 고착되었다. 상대적으로 강고한 유교적 체제를 유지하던 한국과 중국이 근대화에 ‘뒤처진’ 원인을 유교적 지배 때문으로 인식한 것이다. 즉, 근대 일본의 역할과 동아시아 인식에서 유교는 일본 ‘봉건제’론과 비슷한 위치에 있다. 그리고 이렇게 유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아시아에 대한 일본의 우월의식과 결합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11장에서 검토한 근대사상가 후꾸자와 유끼찌(福澤諭吉)와 그에 이은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이다. 이런 인식은 한국에도 영향을 미쳐 이른바 ‘유교망국론(儒敎亡國論)’이 등장하게 되었다. 2부는 유교는 과연 어떤 사상인가, 이를 기반으로 한 조선시대 한국과 명청시대 중국의 국가·사회체제는 어떤 것이었는가, 실상을 파악해 대안적 동아시아상을 구축하려는 시도이다.
제6장 평화의 시각에서 다시 보는 일본 ‘근세화’는 ‘탈아적 역사이해 비판’이라는 부제를 갖고 있다. 1부 논지의 연장선에서 현대에도 뿌리깊게 계속되는 탈아적 일본사 이해를 아미노 요시히꼬(網野善彦) 등의 담론을 검토하며 비판한다. 유교를 이념적 기반으로 소농사회에 적합한 종법질서(宗法秩序) 유지를 통해 중국과 조선의 지배체제가 긴 시간에 걸쳐 동아시아적 ‘근세화’ 프로그램을 수행해간 데 비해, 일본은 한마디로 동아시아 규모의 ‘근세화’라는 변동에 대응할 수 없었다는 것이 6장의 논지이다. 일본은 주자학이념과 상충하는 무사집단에 의해 군국주의화의 길을 걸으면서 근세화를 이룩했다. 이것이 일본이 이룩한 근세의 ‘평화의 질(質)’이며, 이러한 마이너스의 유산을 자각해야만 미래의 역사를 논할 수 있는 것이다. 제7장 일본사 인식의 패러다임 전환을 위하여는 ‘한일병합’ 100주년을 맞아 ‘동아시아 주변부로서의 일본사’라는 시각에서 일본사 이해를 비판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한 글이다. 이제까지 일본에서는 14세기에 동아시아에서 시작된 유교모델의 확립과 보급이라는 사태를 간과하거나 부정적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19세기 중반까지 주변부에 있던 일본이 동아시아의 중심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원인을 일본이 유교질서, 유교적 제약에서 비교적 자유로웠기 때문으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이는 근대에도 이어져, 중국과 한국이 일본에 비해 국민국가 형성이 어려웠던 가장 큰 요인이 유교적 문명주의의 존재라고 파악해왔다. 국민국가의 한계를 지적하고 세계사적 시야를 필요로 하는 지금, 이런 이해는 근본적으로 재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처럼 급속하게 국민국가를 형성하는 게 매우 어려웠던 중국·한국의 근현대사를, 바로 그 어려움 때문에 일본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고 재인식하는 것은 큰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일본이 동아시아 여러 국가들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를 생각할 때, 동아시아 국가들이 유교모델을 수용한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것, 또한 현재에도 그 역사적 경험이 의미를 가질 수 있음을 성찰해야 함을 역설한다.
일본 진보진영의 역사인식이 지닌 한계
제8장 한국사 인식의 함정은 ‘한국병합’에 대한 인식과 관련해 일본사 인식, 특히 일본의 진보적 역사학계의 일본사 인식을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일제시기 일본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한 황국사관은 종전 후 ‘전후역사학’의 흐름 속에서 비판받았다. 그러나 ‘전후역사학’은 황국사관 비판이라는 면에서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한국사 인식에서는 전전(戰前)의 생각을 극복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는 전후역사학 이후의 역사연구에서도 큰 변화가 없음을 『씨리즈 일본근현대사』(岩波書店 2006~10)의 중세 국제관계사를 검토하며 고찰한다. 중심으로서의 일본을 상정하는 인식은 주변국가들을 그야말로 ‘주변국’으로 평가하게 만들지만, 각국의 독자적 역사는 큰 문명의 중심에서 서로 다른 거리에 있는 것이며, 각국의 중심을 갖는 것임을 일깨우고 있다.
전후역사학의 큰 성과를 집약한 『씨리즈 일본근현대사』1~10에 대한 검토는 제9장 ‘방법으로서의 동아시아’를 다시 생각한다에서 이어진다. 전후역사학이 역사적 책임을 앞세워 일본이 선취한 국민국가와 일본의 자립성을 비판함에도 불구하고, 실상을 직시하면 일본의 국민국가가 ‘전통’에 많은 것을 빚지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국민국가 비판도 서구적 기준에 따라 동일한 방법으로 할 수는 없다. 일본이 ‘탈아입구’의 방향으로 질주하게 된 역사적 요인을 생각할 때 중요한 것이 국가와 개인의 ‘자립’ 문제이다. 유교질서 속에서 이상적 보편이념의 실현을 계속해서 추구해온 한국·중국에 비해 국가의 절대화가 강한 일본의 ‘전통’ 자체를 재검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방법으로서의 동아시아’, 즉 한국이나 중국, 베트남 등과 대비해 일본의 역사와 사회를 상대화할 필요성이 여기에 있다.
제10장 일본 동아시아공동체론의 현주소는 2005년 전후로 일본에서 갑자기 고조된 동아시아공동체 논의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고 이것이 앞으로 일본의 진로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조명한다. 패전 후 일본에서 금기어처럼 여겨지던 ‘동아시아’는 1960년대 미국과의 관계 속에서 일본의 현실을 지역에서 고찰하려 한 역사학계에서 큰 관심을 받았다. 이후 동아시아론은 현실적 필요에 따라 경제적·정치적 상황에 맞추어 부침을 겪으며 여러 방면으로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동아시아 전체를 염두에 두고 진행되지는 못했다. 새로운 연구성과가 계속 나오고 있지만 그 대부분이 일본예외론·서구와의 동질론처럼 탈아론적 해석과 쉽게 연결되는 경향이 뿌리깊다. 한국의 입장에서 일본의 논의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필요성을 일깨우는 대목이기도 하다. 일본 우경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안팎으로 높아지는 중에 특히 한국의 동북아논의와 관련해서 일본의 동아시아공동체 논의를 검토할 필요성이 절실해진다.
제11장 후꾸자와 유끼찌의 유교인식은 일본 근대사상가 중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후꾸자와 유끼찌의 유교인식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후꾸자와의 유교지식의 형성과정과 성장배경 검토, 그의 유교비판의 문제점, 유교적 이상주의를 견지한 중국과 한국의 실상을 무시한 후꾸자와의 인식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룬다. 이런 비판은 2부를 이루는 지속적인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일본과 한국·중국 간 역사인식의 대립에는 유교에 대한 올바른 인식의 부재, 그리고 유교를 국가이념으로서 내세운 조선시대 한국과 명·청시대 중국에 관한 대단히 편파적인 이해가 있다. 후꾸자와와 후꾸자와 연구자들의 유교인식에 대해서도 같은 문제를 지적할 수 있다. 후꾸자와가 이해한 유교는 일본식으로 변형된 유교였으며, 그가 한국과 중국을 잘못 이해한 것도 그러한 유교이해에서 연유했을 뿐만 아니라 후꾸자와 연구자들도 후꾸자와와 같은 오류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유교에 대한 이 왜곡된 인식은 결국 적극적인 해외진출론, 침략론의 합리화로 이어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