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역사학자의 눈으로 본 ‘인간 예수’
역사 속 예수의 실체를 밝히는 역저
이 책은 한국 고대사와 설화 전반에 대해 폭넓은 연구성과를 공유해온 김기흥 교수(건국대 사학과)가 역사학의 방법론과 종교적 관심을 결합해 선보이는 예수의 실체에 대한 탐구서이다. 7년여간 국내외의 관련 연구를 두루 섭렵하는 가운데 ‘역사적 예수’라는 성서학의 주제를 역사학의 시각과 방법으로 새롭게 해석해냈다. 예수 당대의 사회상을 역사자료를 통해 재구성하고 성경에 보이는 이적과 종교적 신비 체험을 설화 연구방법론을 동원해 분석하여 인류의 선각자의 한 사람으로서 예수의 실체에 최대한 가까이 가고자 했다. 오병이어와 축귀, 부활 등으로 대변되는 일견 신비하고 일견 터무니없어 보이는 행적과 인류사 2천년을 주도해온 불변의 가르침 사이에서 예수의 참모습을 궁금해하는 독자들에게 좋은 읽을거리가 될 것이다.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는 기독교 신학의 교리에 따라 해석된 그리스도상에 반해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 농부로 태어나 당대를 넘어 서구 문명사 전반에 크나큰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로서의 예수를 탐구하는 신학의 연구주제를 가리킨다. 역사적 인물로 실재했던 예수는 과연 누구인가. 이 물음의 답을 찾는 것이 ‘역사적 예수’가 목표하는 바이다. 이를 위해 예수의 일대기라는 성격을 갖는 복음서들을 비평적으로 분석하고 당대의 역사자료를 바탕으로 사회적·문화적 맥락을 탐구한다. 주제가 주제인 만큼 기존의 역사적 예수 연구는 기독교 신학의 인식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 책은 특정한 신학적 입장이나 해석에 얽매이지 않고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사료를 다루는 역사학적 방법론을 따른다. 40년간 고대사·설화·신화를 폭넓게 연구해온 저자가 200여권의 기존 연구성과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가운데 복음서들의 집필 배경과 사회적 맥락, 시대적 한계를 짚고 거기 보이는 구전자료의 특성과 설화적 성격을 분석하여 예수의 역사적 실재성을 한층 명료하게 그려낸다. 이는 2천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예수의 깨달음과 가르침이 갖는 현재적 의미를 성찰함으로써 노후화되고 비대해진 한국 기독교의 딜레마에 시사점을 주는 것이기도 하다.
목차
책머리에
제1장 예수 이해의 역사적 배경
1. 이스라엘 구약시대: 승리를 꿈꾼 약자의 길
2. 예수 시대의 정치상·사회상
제2장 예수의 역사자료로서의 신약성경
1. 바울서신
2. 복음서
제3장 예수의 가계와 출생
1. 다윗 가계 여부
2. 출생
제4장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남
1. 세례 요한과 예수
2. 세례를 통한 존재의 거듭남
제5장 예수의 인식과 가르침
1. 자유로운 사유
2. 주요 인식
3. 하나님 나라
4. 비유
5. 직관과 역설
6. 예수 사후 그의 가르침
제6장 예수 부활사건
1. 안식일 후 첫날 아침 부활사건
2. 여러 사람들의 예수 부활 경험
3. 예수의 ‘빈 무덤’
4. 부활사건의 성격
제7장 예수의 칭호
1. 하나님의 아들
2. 사람의 아들(인자)
제8장 인간 예수는 누구인가
주
찾아보기
저자
김기흥 (지은이)
출판사리뷰
예수 연구의 기초자료인 바울서신과 복음서들에 대한 비평적 접근
전체 8장 가운데 제1장과 2장은 역사적 예수 탐구의 기본 자료를 다룬다. 1장은 예수 출생 전후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역사를 개괄하여 예수 시대와 유대 민족신앙 이해의 바탕을 제시한다. ‘바빌론 유수’가 대변하는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는 신바빌로니아-로마제국으로 이어지는 강대국의 압제 아래 신음하는 약소국의 것이었다. 오랜 수난 속에서 이들은 민족신 야훼가 가져다줄 장차의 승리와 구원을 믿음으로써 유대민족의 민족적 정체성을 지켰으며, 이는 굳건한 민족신앙과 독자적 문화로 발전해갔다. 여기서 형성된 것이 정치적 구세주, 이른바 ‘메시아 대망’이다. 예수가 태어날 무렵은 장기간 계속된 로마의 식민지배 속에 로마에 기생하게 된 유대 상층 지배계급과 가혹한 수탈에 허덕이는 하층 민중 간에 갈등이 고조되던 시기였다. 문화적 혼합주의를 내세우는 헬레니즘의 압도적 영향하에 유대민족의 민족적 정체성이 흔들리던 상황이기도 했다. 예수는 로마제국-유대 지배계급-예루살렘 성전체제의 삼중 수탈에 시달려 전통적인 자영소농 중심의 농촌경제가 와해되고 공동체가 붕괴하는 가운데 갈릴리의 한 농부로 태어났다. 그는 남다른 감수성으로 신음하는 이웃이 처한 상황을 느끼고 자신의 존재를 고민하면서 구도의 여정을 시작한다.
2장은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가장 기본 자료이자 문서화된 자료인 바울서신과 복음서들에 대한 종합적·비판적 이해를 시도한다. 1세기 중후반에 쓰인 이들 자료가 역사적 예수 연구의 중심자료인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들 자료는 부활신앙에 열광했던 초기 기독교인들이 집필한 것이고, 복음서들은 그것을 작성한 신앙공동체 저마다의 입장에서 재구성된 것이다. 특히 예수의 신성(神性)을 강조하는 구전자료를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거기 혼재하는 역사적 사실과 설화·민담자료를 역사학적 방법론으로 섬세하게 구분, 분석할 필요가 있다. 예수의 전기라 할 수 있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등 4대 복음은 서기 70~100년경에 쓰였는데, 마태·마가·누가·요한으로 대표되는 각 신앙공동체의 관점과 처한 상황에 따라 예수의 행적에서 크고작은 차이를 보여준다. 복음서 저자들은 역사서를 편찬하려 한 것이 아니고 저마다의 신앙공동체 신자들이 필요로 하는 예수상을 재해석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 서로 다른 해석들을 비교 분석하는 것이 역사적 예수 연구의 첫걸음이 된다.
예수의 실재성을 둘러싼 논란: 다윗의 후손/탄생설화/어떻게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났는가
제3장과 4장은 1, 2장의 이해를 바탕으로 성경을 분석하여 예수의 출생 및 행적과 관련한 여러 논란을 다룬다. 3장은 예수의 가계와 출생과 관련한 다양한 견해들에 대한 비평적 접근이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예수를 ‘다윗왕의 자손’으로 전한다. 이에 대해 저자는 복음서들을 정밀하게 살피고 예수의 가족구성과 경제상황, 집안 분위기, 예수 사후 형제들의 활동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예수가 다윗의 먼 후손일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스라엘의 집단적 구원의 상징으로서 장차 올 위대한 왕, 다윗의 자손 메시아를 예수가 자처하거나 내세운 적은 없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행한 기적과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말하지 말라고 명했다.(68면) 구세주라거나 메시아, 장차 올 위대한 왕 같은 호칭에 얽매이지 않고 깨달음을 전하며 구체적인 행위로써 자신을 증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예수는 사랑의 하나님에 대한 확신에 따라 매우 낙관적인 현재적 종말관을 가지고 있어서, 기존 사회체제와 인식체계에 대립하거나 공격을 일삼지 않고 그것들은 그대로 두고서 자신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펼쳤다. 이와 같은 특성에서 그는 자신을 메시아 곧 다윗의 자손으로 보는 인식도 굳이 적극적으로 부정하지 않음으로써 소모적 논쟁을 피했던 듯하다.”(77면) 그런데 예수의 이런 면모는 이후 부활사건을 기점으로 추종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론을 주장하는 단초가 되었다.
예수의 출생과 관련해서는, 널리 알려진 ‘동정녀 탄생’(virgin birth)이나 동방박사의 경배, 헤롯왕의 박해와 아기 예수의 애굽(이집트) 피난 등은 모두 “일대 역사적 위기 속에 전능한 신의 위로와 임재가 더욱 강력하게 요청된 가운데, 민중의 바람을 업고 예수 탄생이 보다 신비롭게 이야기된 결과가 아닐까 추정해볼 수 있다.”(87면) 특히 동정녀 탄생 같은 신비한 이야기는 고대 영웅이나 건국시조의 비현실적이고 신비한 탄생설화에서 보듯 전세계적으로 공통된 현상임을 밝히는 데서 저자의 고대사·신화학 연구의 깊이를 엿볼 수 있다. 함께 흔히 거론되는 ‘예수 사생아설’ ‘비실재설’에 대해서는, 전자는 성경에서 간통으로 돌에 맞아 죽을 위기에 처한 여인의 일화 등과 당대의 문화와 풍습에 비추어 비현실적인 주장이며, 후자는 고대의 역사적 특성상 객관적 문헌자료가 부족하지만 성경 외에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Flavius Josephus)의 『유대고대사』와 예수 사후 형제들의 행적에 비추어 역사적 실재를 도저히 부인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4장은 흔히 ‘마지막 선지자’로 알려진 세례 요한과 예수 관계의 역사성, 세례 요한과 예수의 하나님 나라 구현에 대한 인식 차이, 세례를 통한 예수 존재의 거듭남[重生]을 다룬다. 예수 추종자들이 예수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가급적 언급하지 않으려 했으나, 여러 자료와 정황을 재구성해볼 때 예수가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제사, 어려운 말로 민중을 현혹하고 교리를 앞세워 가난한 이를 수탈하는 제사장 집단의 폐해에 반대한 것은 세례 요한과 예수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양자는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는 방식에서 방법론적 차이를 보였다. 종말이 가까웠으니 속히 회개할 것을 주장한 세례 요한에 비해, 예수는 지금 여기서 실현해가는 현재적 하나님 나라(현재적 종말론)를 주장했던 것이다. 이런 근본적인 인식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양자의 관계가 역사적 의미를 갖는 것은 세례 요한의 처형 이후 예수가 펼친 권위있는 가르침이 세례과정에서 있은 놀라운 종교적 체험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이때 예수는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고 하늘에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마가복음」 1:9~11)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전한다. 이 구절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우나, 이는 세례 받는 순간 예수의 존재를 완전히 바꾼(거듭나게 한) 일대 인식의 전환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예수의 모든 가르침은 이때의 체험으로 권위를 갖게 된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과 자신이 부자관계를 이룬다는 인식은 이후 인간 일반으로 확장되어,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것을 자각하여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삶으로써 바로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자는 것이 예수 가르침의 골자이기 때문이다. 그의 이런 인식은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가져온 그들 민족이 하나님의 장자(長子)라는 선민주의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다. 보잘것없는 한 인간으로서 신과의 일치를 체험한 예수는 막강한 권위와 함께 절대자 앞에서의 한없는 겸손, 미미한 자신을 아들로 불러준 데서 기원하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이스라엘을 억압하는 타민족을 정벌하는 심판의 하나님은 정의와 사랑의 하나님으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시공을 뛰어넘는 가르침의 재해석
5장은 하나님의 아들로 예수가 얻은 인식과 가르침의 요지와 방법론을 고찰한다. 예수는 오늘날 보아도 놀라울 정도로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은 가르침들을 펼쳤다. 여성과 어린이, 병자 등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사람들을 우선해 보살피도록 하고, 기계적 이해타산을 초월한 경제적 평등을 설파하며, 겸손과 섬김의 리더십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 바탕에는 그리스 철학, 헬레니즘 문화, 이스라엘의 전통적 유일신 신앙 등이 결부되어 있었지만 신비한 종교 체험을 통해 얻은 깨달음이 근본을 이루는 것은 물론이다. 저자는 예수 인식의 특징을 자유로운 사유로 보고 인식방법론에서 직관적 이해에 주목한다. 예수의 자유로운 사유는 근본적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났음을 확신한 데서 온 것이지만 그의 가계의 전통과 타고난 유연한 기질에서 기인하기도 한다. 예수를 질시하고 경계하던 반대파는 물론 제자와 설교를 듣는 대중들의 끊임없는 질문에 거침없이 응대하고, 인습과 혈연에 얽매이지 않고 가족관계까지 상대화하며, 해학과 유머를 구사해 가르치는 여유는 충만한 지적 탐구욕과 함께 그의 유연함과 자유로움을 보여주는 예들이다. 이런 특성은 기성 율법과 교리에 얽매이지 않고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직관적 이해로 이어졌다. 안식일 관련 계율을 못 지킬까 전전긍긍하는 사람들에게 던진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다’는 가르침이나 율법을 얼마나 지키느냐가 아니라 마음으로라도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깨우침 등이 그것이다.
그는 이런 본질적이고 간명한 인식을 풍부한 비유와 역설을 구사해 대중에게 설파했다. 저자는 가르침을 전하는 방법론으로서 비유와 역설에 주목한다. ‘받으려면 먼저 주라’ ‘잃는 자는 얻으리라’ ‘높아지려고 하면 먼저 낮아져야 한다’ ‘남에게 대접을 받으려면 먼저 대접해야 한다’ ‘쉼을 얻으려면 먼저 멍에를 메야 한다’ 같은 역설은 예수가 고도의 통찰력을 바탕으로 쉽고 효과적으로 청중을 깨우치는 강력한 방법이었다. 또한 저자는 ‘밭에 숨겨진 보화’ ‘값진 진주’ ‘겨자씨 한알’ ‘포도원 품꾼의 일당’ ‘포도원 농부’ ‘옳지 않은 청지기’ ‘참된 이웃 사마리아인’ ‘잃은 양’ ‘돌아온 탕자’ 등 널리 알려진 비유들을 재해석하여 예수의 취지를 본뜻에 가깝게 이해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예수가 대중에게 말할 당시의 원형이 살아 있는 정도, 복음서를 정리한 신앙공동체들 간의 관점의 차이 등을 각 복음서들의 구절과 당대 상황을 종합적으로 비교해 분석하고 있다. 늦게 온 일꾼이나 먼저 온 일꾼이나 같은 일당을 주라는 포도원 품꾼의 비유는 현대인의 시각으로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여기서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염려하고 보장하려는 하나님의 뜻, 예수의 뜻을” 본다. 나아가, 당시의 역사적 상황으로 보면 이 비유는 “매우 온건한 이야기 형식을 취했지만, 로마제국이 주도하는 당시 세상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내포하고 있다. 강자 독식의 질서를 앞세운 세상 지배체제에 대해, 생존을 위협받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근본적 생활대책을 마련할 것을 촉구하고”(221면) 있음을 읽어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난 예수는 인간 세상의 질서와 체제를 넘어 사랑의 하나님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고 인간을 대했으며, 그것이 예수의 사유와 행적을 일관하는 관점이라는 것이다.
예수 사후 부활사건과 부활신앙
예수는 생전에 “지금 이 땅에서 실현되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이 이루어야 할 지극히 현실적인 연대운동”으로서 현재적 하나님 나라를 추구했다. 그러나 그의 사후 예수가 신으로 믿어지면서 예수가 설파한 하나님 나라는 장차 예수의 재림으로 “선물처럼”(248면) 주어질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 민중을 하나님의 “종이 아닌 친구라 말하며” 그들의 “자발적인 인격을 고양해 현실의 낙망과 좌절에서 벗어나도록 독려한 예수의 의도는 충분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후대에 이루어진 이러한 예수의 신격화와 그 핵심 가르침에 대한 조정은 “실로 심각한 가르침의 배반이 아닐 수 없다.”(249면) 즉 예수 자신과 그리스도교 간에 괴리가 벌어진 것이다. 제6장은 이렇게 예수가 신앙화된 결정적 계기의 하나인 부활사건을 재해석한다. 4대 복음서의 부활 기사들을 꼼꼼히 비교하여 기사들 간의 차이(누가 예수의 곁을 지켰는가, 다음날 무덤을 찾아간 것은 누구인가, 무덤의 상태는 어떠했는가 등)를 밝히고, 부활 기사에 들어 있는 설화자료, 후대의 윤색과 윤색의 배경 등을 분석한다. 그 결과 “어느정도 믿을 만한 공통적 요소로 ‘빈 무덤’이 있을 뿐, 천사의 출현이나 부활 예수의 현현은 복음서들 간에도 일치하지 않는 비역사적·설화적·신앙적 요소임을 확인”(268면)하게 된다. 예수의 부활은 부활한 예수를 만났다는 여러 사람들의 증언으로도 뒷받침되고 있었는데, 저자는 이에 대해서도 면밀한 분석을 통해 제자들의 사무치는 그리움 같은 심리적 체험이 예수의 존재감을 불러일으켜 부활에 대한 긍정이 되고, 이것이 윤색되어 복음서에 실렸을 가능성을 추론해낸다. 즉, 부활의 확신은 종교적 신비 체험의 범주에 속하며 이를 있는 그대로의 사실로 주장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복음서 기록들 간에 엄존하는 혼란과 차이를 가볍게 여기고 억지로 연결하여 해석하며 사실성에 문제가 없다고 하는 주장은, 부활사건을 그것 자체가 경험된 본래의 상황 속에서 받아들이지 않고 그 시간 그 무덤 앞에 있었다면 누구나 볼 수 있었을 역사적 사실인 양 전제하는 근본적 오류를 안고”(302면) 있는 것이다.
인간 예수는 누구인가
제7장과 8장은 복음서에 보이는 예수에 대한 호칭을 검토해 예수가 신앙화되는 과정을 살피고 예수의 정체성을 정리한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인가 사람의 아들인가. 이 물음은 흔히 예수는 신인가 인간인가로 해석되기 십상이다. 7장에서 저자는 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에 대한 호칭을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아들(人子)’로 나누고, 양자가 배치되는 것이 아님을 밝힌다. 예수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자부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 것은 신약성경에 잘 드러나 있다. 그러나 자신을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독생자/독자)로 여긴 적은 없다. 예수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보았으며, 그런 뜻에서 자신도 하나님의 아들로 여긴 것이다.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깨닫고 사랑의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뜻에 충실하게 수행하게 하는 것이 그의 ‘현재적 하나님 나라 운동’이었던 것이다. 예수를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로 만든 것은 후대에 예수를 구원의 메시아로 본 예수 그리스도론의 산물이었다. 이런 오해는 ‘사람의 아들(인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사람의 아들’은 ‘하나님의 아들’과 대척점에서 인간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는 듯 보이는 개념이지만, 사실상 복음서에 보이는 ‘인자’는 인간 일반을 가리키는 용어이며 그 이상의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 저자는 복음서의 인자 용례와 횟수를 면밀하게 조사하여 여러 호칭에 가린 예수 자신의 정체성 인식을 살펴본다. 그럼으로써 인자가 예수에게만 해당하는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신앙을 가진 추종자들과 복음서 저자들”이 “예수의 말들을 적극 윤문”한 결과임을 규명한다. 그들은 이런 윤문을 통해 “거룩한 ‘인자 예수’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했던 것이다.”(364면) 예수는 “자신이 재인식한 정체성, 모든 인간 개개인이 향유할 수 있는 보편적인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제자들을 포함한 다른 이들에게도 알려주려 노력했으나, 마지막까지도 애로를 겪었다.”(365면) 현실의 고난에 허덕이며 신의 구원을 갈망하는 이들에게 예수는 구세주여야 했던 것이다.
지금 이곳에서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려던 예수의 운동은 실패했다. 예수 당대의 대중들은 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그의 시대는 그를 용납하지 못했다. 그는 처형당했고, 사후에는 그의 뜻과 다르게 신앙화되었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의 요체는 2천년의 시차를 뛰어넘어 오늘날까지도 진정으로 인간다운 삶, 진실과 사랑과 겸손의 삶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큰 울림을 남기고 있다. 이는 여러 왜곡과 부정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르침이 인간의 본성에 맞닿아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