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인간의 얼굴이 개인의 존재를 표현하듯, 건축은 사회의 존재 그 자체를 표상한다. 인간 사회의 이상과 권위는 대성당과 궁전 같은 기념비적 건축의 형태로 세워져 민중에게 호소하거나 침묵을 강요한다. 조르주 바타유는 건축이라는 말의 의미가 아니라 그 ‘작용’에 주목해 ‘반건축적’이고 ‘비구축적’인 글쓰기를 전개함으로써, 건축이 상징해 온 서구적 사유의 전통을 전복한다. 말할 수 없는 것, 불가능한 것을 건드리는 바타유의 글쓰기는 인간 우월성의 하찮음을 폭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며, 이것이 바로 이 책의 제목인 ‘반건축(反建築)’이 함축하는 의미다. 저자 드니 올리에는 독창적인 방식으로 바타유의 반건축적 사상과 문학을 심도있게 분석한다. 서구의 인본주의적 문명 배후에 감춰진 차원을 드러내고 그 사회의 한계와 모순에 주목하는 이 책은, 건축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을 전제로 한 서구 주류 철학의 전통과는 ‘다른’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합리와 발전의 신화를 바라보는 비판적 시각을 제시한다.
목차
서문 인생의 일요일
헤겔적 구조물
단순한 시작
헤겔적 구조물
바벨탑
상징
건축적 은유
랭스의 노트르담 대성당 (1)
『랭스의 노트르담 대성당』 (2)
바타유에 관하여
건축적 은유
신학총서
‘건축’이라는 항목
미로, 피라미드 그리고 미로
미로와 피라미드
제왕절개
불완전
학살
「송과안」
1. 호모 사피엔스
2. 맹점
3. 분변학
4. 송과안
5. 『하늘의 푸른빛』
제왕절개
주註
역자 해설 철학의 구축과 반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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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드니 올리에 (지은이), 배영달, 강혁 (옮긴이)
출판사리뷰
“태초로부터 인간의 질서는 건축의 발전에 지나지 않으며, 건축적 질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만약 우리가 건축을 공격한다면 그것은 바로 인간을 공격하는 것이다.” - 조르주 바타유, ‘건축’, 「비평 사전」 『도퀴망』, 1927.
프랑스의 작가이자 사상가 조르주 바타유(Georges Bataille, 1897-1962)는 프랑스 철학의 유행과 함께 국내에 소개되었지만, 푸코, 데리다, 바르트, 들뢰즈, 라캉 같은 사상가들에 비해서는 우리에게 여전히 생소한 인물이다. 그의 저서와 소설이 십여 종 번역되었을 뿐 그에 대한 연구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더욱이 그가 자신의 사상을 전개하는 데 사용했던 ‘건축’이라는 개념은 거의 논의된 바 없다. 서구에서조차 바타유는 포스트구조주의나 해체주의, 페미니즘과 관련해 언급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그의 독창적인 사상에 대한 관심이 점차 늘어 가고 있다. 인간 이성으로 모든 것을 파악하고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이 힘을 잃어 가고 있는 세태 속에서, 합리성으로 규정이 불가능한 타자성이나 이질성 같은 문제들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에 번역 출간된 『반건축: 조르주 바타유의 사상과 글쓰기(La prise de la Concorde: Essais sur Georges Bataille)』는 국내에 최초로 소개되는 본격적인 바타유 연구서이다. 저자 드니 올리에(Denis Hollier)는 바타유 연구의 권위자로, 갈리마르 출판사의 『조르주 바타유 전집』(전 12권, 1970-1988) 책임 편집자이기도 했다.
제목에선 건축 전공자들을 위한 이론서로 보이지만 이 책은 철학서이자 문학비평서로 보는 게 더 옳다. 프랑스어판 제목을 직역하면 ‘콩코르드 광장의 점령’인데, 콩코르드 광장은 프랑스혁명 당시 루이 16세를 비롯해 수많은 인물들의 참수가 행해진 역사적 현장으로, 훗날 ‘화합’ 혹은 ‘일치’라는 뜻의 ‘콩코르드(concorde)’라는 역설적인 이름이 붙여졌다. 따라서 ‘콩코르드 광장의 점령’은 바타유의 상상력을 통해 지정된, 파리의 어떤 중요한 장소, 즉 견고한 체계가 붕괴되는 것을 목격했던 장소를 지시한다. 하지만 이런 배경 설명 없이는 이해하기 어려워, 한국어판에서는 다가가기 쉽고 책 내용을 잘 포착하고 있는 영문판 제목 ‘건축에 반대하여(Against Architecture)’를 참고해 ‘반건축’을 제목으로 삼았다. ‘반건축’은 바타유의 사상과 글쓰기의 지향성을 잘 드러내는 말이며, 저자가 바타유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을 함축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낭비와 건축 - 도살장과 박물관
가장 먼저 나오는 서문 「인생의 일요일(Les dimanches de la vie)」은 1974년 초판에는 없었고, 1989년 영문판의 출간을 위해 ‘피의 일요일(Bloody Sundays)’이라는 제목으로 추가된 글이다. 우리가 저본으로 삼은 1993년 프랑스어판 재판시 ‘미국판 서문’이라는 말과 함께 책 끝에 더해 졌고, 한국어판에서는 원문을 번역해 책 앞쪽에 수록했다. 여기서 ‘인생의 일요일’, ‘피의 일요일’이란, 바타유가 초현실주의 잡지 『도퀴망(Documents)』의 한 섹션인 「비평 사전」에 건축과 관련해 쓴 ‘도살장(Abattoir)’과 ‘박물관(Musee)’ 항목과 연관된다. 근대 파리의 도시 계획이 가져온 커다란 변화 중 하나는 도시 속의 기피 시설이 문화공간으로 바뀌는 현상이었는데, 이십세기 말 건축가 베르나르 추미에 의해 라 빌레트 도살장이 공원과 박물관으로 개조되는 프로젝트로까지 이어졌다. 이러한 현상과 바타유가 쓴 사전 항목에서 올리에는 건축과 낭비(depense) 사이의 유기적 연결을 발견한다. 도살장과 박물관이라는 극단적으로 다른 두 시설은 종교와 예술이라는 독립된 영역을 나타내는 건축 형식이지만, 서로 무관하지 않으며 삶의 양면을 비춰 준다.
올리에는 도살장의 희생제의적 성격(종교)과 사람들이 일요일에 박물관을 관람하러 간다는 사실(문화)을 상기시키면서 양자를 안식일 또는 일요일의 리듬과 연결한다. 그들은 박물관의 아름다움을 통해 도살장의 전유할 수 없는 추함으로부터 도피한다. 바타유는 이렇게 쓴다. “박물관은 대도시의 허파와 같다. 군중들은 일요일마다 피처럼 박물관으로 흘러들면서, 순화되고 생기발랄하게 다시 살아난다.”
루브르박물관 역시 왕의 처형에 뒤이은 공포정치에 의해 만들어졌으니, 근대 박물관의 기원은 단두대의 피와 이어진다. “도살장이 지각되지 않는다면 루나 파크는 존재할 수 없다”는 올리에의 말처럼 우리는 건축 이면의 상실과 축제, 죽음과 낙원 모두를 기억해야 한다.
현실 질서에 복무하는 건축은 이성의 지배, 노동의 생산, 계획과 비축, 계산과 유용성을 상징한다. 반면 비합리적이고 부도덕하며 무의미한 행위로 간주되는 낭비는 배척해야 할 부정적 습속이다. 하지만 오히려 바타유는 낭비에 주목하며 그를 옹호한다. 낭비는 욕망의 해방을 의미하고 예술 행위와도 무관하지 않다. 나아가 인간을 사물화하는 자본주의적 체제에 대한 저항이자 탈주이다. 모든 낭비를 적대시하고 자본의 합리성과 효율성만을 강조함으로써 오히려 그보다 더한 돌이킬 수 없는 자기 파괴로 질주하는 문명에 제동을 거는 것이다.
반건축적 사상의 기원 - 대성당과 신학총서
본문은 크게 네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반이 반건축이라는 관점에서 바타유의 사상을 논하고 있다면, 후반은 언어와 건축의 상동성, 바타유의 이질학적 글쓰기 즉 문학 작품에 대한 구체적인 비평에 할애되어 있다.
첫번째 장인 「헤겔적 구조물」에서는, 바타유의 위반의 사상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헤겔이 상징적 예술로서 특권을 부여한 건축 형식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왜냐하면 건축(architecture) 또는 건축적 구조를 지닌 무엇을 부정하기 위해서는 그 최초의 시작인 아르케(arche, 시작, 근원, 기반, 원리, 제일)를 알아야 제대로 매듭을 풀 수 있기 때문이다. 헤겔은 바벨탑을 상징적이고 독자적인 건축의 최초 형태로 보았다. 다시 말해 속이 비어 있는 집이나 신전 같은 수단으로서의 건축과는 차별되는, 속이 가득 찬 예술로서의 건축이다. 이후에 ‘남근적 기둥인 오벨리스크 따위의 건축과 조각 사이의 매개적인 건축물’이 생겨나고, 그 다음에 인도와 이집트의 지하건축물, 피라미드 같은 죽은 자들을 위한 거처, 실용적인 건축물과 함께 ‘독자적인 건축에서 고전적인 건축으로의 이행’이 이루어지게 된다.
두번째 장 「건축적 은유」에서는 바타유의 반건축적 사상의 근원을 추적해 간다. 올리에는 바타유가 가장 처음 발표한 글인 1918년 소책자로 발행된 『랭스의 노트르담 대성당(Notre-Dame de Rheims)』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전문이 이 책에 수록되어 있다.) 헤겔의 건축관을 모른 채 쓴 이 글에서 바타유는 노트르담 대성당을 프랑스의 상징이자 모성과 순결, 신앙과 안전의 상징으로 상정하고, 독일과의 전쟁으로 인한 처참한 파괴를 안타까워하며 복원을 촉구한다. 대성당의 ‘부정에 대한 부정’으로서 지양(Aufhebung)과 정반합의 도식을 취하고 있는 이 글은 건축적인 구성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건축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찬양이라는 점에서 친(親)건축적이다. 젊은 바타유가 쓴 생애 최초의 글은 ‘건축에 의해 상징되고 지지되는 거대한 이데올로기 체계’의 소산이었으며, 그것의 무의식적 추종이었다.
긴 침묵 끝에 바타유는 이 최초의 자기 글을 부정하는 글쓰기를 재개한다. 이후 그의 작업 전체는 그 텍스트를 부인하고 다시 쓰는 것이 되었다. 건축적 구조를 흐트러뜨리기 위한 바타유의 글쓰기는, 감화시키고 교화하고자 하는 모든 것에 도발하는 반건축적 행위였다. 1929년과 1930년에 걸쳐 바타유는 『도퀴망』에 동료들과 함께 「비평 사전」을 만들었다. 그는 사전에서 말의 의미가 아니라 ‘작용’에 주목한다. 미완성으로 끝난 이 사전편찬의 기획에서 바타유는 열네 개의 항목을 집필하는데 그 첫 항목을 ‘건축(Architecture)’에 할애한다. 여기서 바타유는 건축을 사회의 실체를 표현하는 것이며, 초월적인 실재를 표상하는 기호라고 말한다. 하지만 건축은 동시에 사회의 실체를 은폐하기도 한다. 건축은 사회 질서를 반영,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회 질서를 수호하고 구성하는 체계이다. 사회를 지속하고자 하는 욕망은 건축에 의지하고, 동일성의 수호자인 철학과 이성 역시 그 부실함과 무근거를 감추기 위해 건축을 은유로 소환한다.
책 또한 건축과 많은 점에서 유사성을 지닌다. 지식 권력의 등가물로서 닫히고 완결된 체계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중세 고딕성당은 지식의 논리 체계를 가시적으로 보여준 ‘돌로 된 책’이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총서(Summa theologica)』는 당대의 지식 전체를 체계화하려던 기획이었으며, 그는 스스로를 기초를 쌓는 건축가로 지칭한다. 여기서 책과 건축 양자는 구조적으로 상동성을 띠면서 전체와 부분에서 위계적이고 유기적인 관계를 갖는다. 바타유는 이런 체계에 반하는 『반신학총서(Somme athelogique)』를 기획함으로써 ‘랭스의 노트르담 대성당’을 지워 나간다.
언어와 존재의 건축적 은유 - 미로와 피라미드
“인간에 관련되는 한, 모든 존재는 특별히 언어와 연결된다. (…) 그러므로 개인의 존재는 ‘자율적인 존재’로서, 그러나 매우 근본적으로 ‘관계적인 존재’로서, 어떤 존재를 나타낼 수 있는 말을 통해 오로지 임의적으로 매개될 뿐이다. 예기치 않은 통찰력으로 인간 존재의 미로 구조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말의 반복되는 행로의 자취를 잠시 쫓아가면 된다.” ? 조르주 바타유, 「미로(Le labyrinthe)」.
세번째 장 「미로, 피라미드 그리고 미로」에서는 인간의 언어 구조와 바타유의 글쓰기를 미로와 피라미드라는 두 건축 유형에 비유해 분석한다. 인간 존재는 언어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언어의 매개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언어는 존재를 매개함으로써 자신으로부터 존재를 분리하면서 존재를 구성한다. 또 언어 자체도 계사(繫辭, copule)의 매개에 힘입어 어떤 하나를 다른 것에 연결한다. 그러므로 언어는 계사와 실질(substance) 사이의 싸움이다. 건축에 비유하자면 미로와 피라미드 간의 겨룸이다.
저자는 바타유의 글쓰기가 미로적이라 말한다. 그것은 아리아드네의 실을 찾아 미로를 탈주하려는 도정이 아니라, 미로 공간에서 길을 잃고 헤매면서 끊임없이 이탈하는 도정이라는 점에서다. 그는 기꺼이 미로에 갇히고자 한다. 미로는 안팎도 경계도 출구도 없는 무질서의 공간으로 위계도 없고 무정부적인, 정위(orientation)가 불가능한 공간이다. 바타유가 보기에 존재(언어)의 구조 자체가 바로 미로이고, 피라미드는 그 미로를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 건립된 허구적/가상적인 건축이다. 피라미드의 건립자, 곧 건축가가 바로 철학자들이다. 피라미드의 꼭대기에서 그들은 존재의 전경을 포착할 수 있고 미로를 벗어나는 지도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병적인 장난’이다. 철학의 치명적 문제는 자신의 맹점에 대해 무지한 채 자신의 ‘봄/앎’을 맹신한다는 것이다. 피라미드는 건축이 지닌 힘과 한계를 지시한다. 철학, 과학, 이론은 인간을 안심시키고 조화와 통일로 이끌지만 그것은 장악이자 지배이며 억압이기도 하다.
그러나 바타유도 인정하듯 그릇된 길일지라도 그것은 갈 수밖에 없는 길이고, 노력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미로와 피라미드 사이에서 양자택일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지 않으며, (현실에서는 피라미드가 우위를 차지하지만) 둘은 서로 연루되어 있다. 피라미드의 은유는 인간 실존의 불가피한 숙명을 상징한다.
문학적 실천 - 위반의 글쓰기
마지막 장 「제왕절개」에서는 바타유의 글쓰기, 즉 문학 작품에 나타난 그의 반건축적 사상의 실천을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바타유에게 문학, 곧 글쓰기(ecriture)는 자신의 사고를 피력하고 표현하는 수단에 머물지 않고 건축으로 상징되는 체계적인 이론, 곧 철학으로 대표되는 학문을 거부하고 저항하는 방편으로 제시된다. 다시 말해 바타유의 글쓰기(문학)는 집짓기(건축)에 대립하는 대안적인 수단이자 철학(구축)에 저항하는 방식으로서 그의 사유의 본령을 점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소설은 이야기를 장악해 가는 탄탄한 구조를 지닌 글들과 관련이 없다. 대신 책이라 부를 수 없는 책, 끝이 없는 미완성의 책으로 차이의 공간을 열어 보인다.
바타유는 자신의 글쓰기가 에로티시즘에 의해 지배받았다고 했다. 섹스가 생식과 소멸 사이에 흔적으로서 차이를 만드는 것이라면 그의 글쓰기 역시 그러하다. 인간 존재가 거기에 몰입해 길을 잃는 위험한 행동을 무릅쓰게 된다는 점에서 에로티시즘은 미로와도 같다. 개체성의 상실이자 청결의 상실, 경계와 한계의 파괴인 에로티시즘은 ‘로고스의 이론적 공간을 해체’한다. 동일성의 신화나 정통성에 반하기에 이질학(heterologie)에 속하는 에로티시즘은 모든 실체(피라미드)를 패러디로 나타나게 한다. 외설스러운 바타유의 글쓰기는 위반을 극한까지 탐색하는 향락(주이상스, jouissance)의 글쓰기이다. 폭력적이고 잔인하며, 과잉과 극단, 공허로 점철된다. 위반으로 가득한 불가능한 그 이야기들이 단순한 작품 생산을 넘어선 실천적 글쓰기의 소산으로 존재하는 이유이다. 그리고 여기에 반건축이란 주제가 자리 잡고 있다.
바타유의 소설에는 기존의 문학이나 철학에서 금기시해 온 지저분하고 천박하며 잔인한 내용과 말들이 등장한다. 성애와 관련된 신체 기관과 배설과 관련된 기관에 대한 묘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포르노와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 바타유의 글에는 똥오줌, 정액, 생리혈, 토사물, 피, 침처럼 몸에서 배출된 액체들, 절규와 흐느낌과 웃음, 쾌락과 공포가 계속 등장한다. 반건축적인 전략에서 의도적으로 도입된 그것들은 바타유가 「비평 사전」에서 ‘비정형(Informe)’이라 규정한, 제 형상을 지니지 못한 것들이다. 이러한 것들이 속하는 이질학, 분변학(scatologie), 기저 유물론(bas materialisme) 등은 관념론에 맞서 싸우는 주요 무기이다. 높고 낮음의 차이를 혼동시켜 모든 기초를 흔드는 물질들은 철학의 영토 내에 편입되지 않는 타자를 불러내 철학의 무능을 폭로하는 효과적인 수단이다. 나아가 근대의 계몽적 이성과 사회, 문화, 경제, 그리고 예술이 지닌 구축적 본성을 뒤흔든다.
주체의 제거 - 디오니소스적 제왕절개
올리에는 바타유가 글쓰기에 사용한 독특한 비유와 상징을 나열하며 글을 전개해 나가는데, 그의 모든 작품을 파악하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내용을 따라가기는 상당히 난해하다. 바타유는 머리, 눈, 입, 엄지발가락과 같은 인체 부위, 성기, 항문 등 성행위나 배설과 관련된 신체 기관, 임신, 세포, 분열 생식, 제왕절개 같은 생물학적 의학 용어 등을 자주 사용한다. 그는 하나의 신체 기관에 상징적 작용을 가하고 그것을 사전 항목이나 글에서 개별적으로 다루면서 기관을 기관의 지주(支柱)로부터 분리시킨다. 이는 각 항목을 의미가 집중되는 장소로 만들고, 이러한 집중을 통해 부분은 전체와 관련된 가치를 지닌다.
예를 들어, “엄지발가락은 인간 신체 중에서 가장 인간적인 부분이다”라는 문장은, 비천한 것으로서 인간을 취급하려는 바타유의 결정 때문에 도발적으로 읽힌다. 엄지발가락이라는 신체의 단일한 지점으로 인간 전체가 응축(집중)되는 것은 이 전복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또한 바타유는 그의 소설 『눈 이야기』에서 보이듯, 유별나게 ‘눈’에 집착했다. ‘송과안(松果眼, L’oeil pineal)’은 바타유 사상의 핵심 개념들 중 하나로, 이를 서구적 합리성의 ‘맹점’, 지식을 해체하는 ‘세번째 눈’, ‘비지식의 기관’으로 여겼다. 이 개념적 장치는 그의 작품 「제쥐브」와 「송과안」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더불어, 그가 눈의 맹점을 넘어 지성의 맹점을 논하면서 인간의 지적인 실명을 연구한 것은 우리를 당대 학문의 본성에 대한 성찰로 이끈다.
탄생과 죽음, 혹은 생식과 소멸의 결합으로 성교의 진리를 구성하는 ‘분열 생식(La scissiparite)’은 바타유의 분석들 속에 일찍 등장하는 주제이다. 분열 생식 현상은 에로티시즘과 죽음의 통일을 실현하는 것이다. 실제로 생식기관이 없는 존재들은 분열 생식을 통해 번식한다. 그것들은 분열되면서 증식한다. 따라서 성적 차이의 부재는 자손의 출현과 원래 개체의 죽음 사이의 정확한 동일성(공존)을 내포한다. 이는 제왕절개 수술과도 일치하는 성격이다. 본래 ‘제왕절개(cesarienne)’는 지금과 달리, 어머니가 분만하기 전 사망할 경우 복부를 절개하여 아이를 살리기 위한 수술이었다.
따라서 어머니의 죽음을 의미했다. 여기서 희생된 것은 어머니 자체라기보다는 이중의 근원으로, 두 부모 중 필요 없는 한 부모이다. 이중의 근원은 바로 미로로 향하는 문이다. 피라미드는 오직 하나의 문만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과학(권력)은 어머니를 죽인다. 이는 어머니를 제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머니를 대체하고 대신하기 위해서이다. 어머니는 오로지 개념을 보전하기 위해 죽고, 천상으로 올라가 이상화되고 순결한 모습으로 변모한다. 그러나 이카로스적 제왕절개가 아닌, 그와는 다른 디오니소스적 제왕절개는 과학이 근거로 삼고 있는 바로 그 토대를 과학으로부터 가로챈다. 하나의 피라미드로 단순화되는 대신에, 이중의 근원은 미로 속으로 분산된다. 이 두번째 제왕절개는 어머니를 죽이고 태어난 자손인 카이사르의 머리를 잘라냄으로써 존재와 부재를 하나로 일치시킨다.
타자성의 체험 - 비정형의 글 읽기
지금까지 살펴본 바타유의 반건축적 사유는 철학으로 대표되는 서구의 학문 체계와 논리의 모델로서 건축이 특별한 지위를 지녀 왔음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건축으로서 철학은 붕괴했다”고 료타르는 의기양양하게 선언했지만 알랭 바디우는 “어떤 방식으로든 건축적이지 않은 철학을 생각할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 논리와 체계를 견지하는 한 철학과 학문은 구축적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차이와 타자 같은 개념이 점점 중요해지는 현실에서, 이성이 지배하는 질서의 닫힌 체계에 저항해 낭비와 불복종을 추구하는 바타유의 외부자적 시선은 그 자체로 소중하다. 또한 『반건축』은 실체로든 관념으로든 건축에 관해 못 듣던 ‘다른’ 이야기를 해 줌으로써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고, 문화와 실재 사이의 간극을 깨닫게 한다. 건축을 향한 무조건적 긍정을 전제로 작업하고 있는 이들(실제 건축가들뿐만 아니라 비유적으로 이 사회의 모든 건설자들)에게 자신의 전공과 실천에 대해 되돌아보는 기회가 되리라 기대한다.
이 책은 담고 있는 내용 못지않게 그 형식 자체가 굉장히 난해하고 복잡하다. 바타유가 자신의 사상을 체계화하거나 서사를 전개하는 데 별 관심이 없었던 만큼, 그에 관한 에세이인 이 책 역시 그러하다. 체계적인 논술 형식을 취하는 대신 단편들의 성긴 묶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바타유의 삶에 일어난 사건들, 그와 관련된 인물, 단체, 문헌 들이 도처에 흩어져 있다. 바타유가 지어낸 생소한 개념어, 저자가 인용하는 전문용어, 책과 글들 역시 산발적으로 등장한다. 영문판이 프랑스어 원전의 상당 부분을 생략하여 간략한 편역본이 된 것도 이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한국어판의 경우 프랑스어판 원문을 충실히 번역하여 우리말만으로 독해가 충분히 가능한 텍스트가 되도록 노력했다. 여러 차례 수정 보완했고 두 역자가 교차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다. 기울임체로 구분된 긴 단락들, 고딕체와 굵은 명조체로 강조된 부분 등은 원서의 편집 형식 역시 최대한 따른 결과이다. 대신 한국 독자들을 위해 상당량의 역주를 추가해 넣었다.
낯선 건축 용어나 개념에 대한 설명이 독서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길 바란다. 바타유를 의식한 듯한 올리에의 이러한 비평서를 읽는 것도 바타유 특유의 글쓰기와 그의 사유 방식에 다가가는 하나의 체험이 되리라 생각한다. 또한 책 끝에는 건축학자 강혁의 역자 해설 「철학의 구축과 반건축」이 수록되어, 서구적 사유의 구축적 전통과 실제 건축과의 연관성, 바타유를 비롯한 반건축적 사유의 대두, 그리고 현대 건축과의 관계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돕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