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새뜻하고 소슬한 초록 생명의 숲으로의 초대
우리의 멋과 가락으로 빚어내는 은은한 시조의 향기
『답청』(踏靑)은 인간과 자연,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며 신비로운 서정의 세계를 구축해온 유종인 시인의 여덟 번째 시집이자 두 번째 시조집이다. 30여 년의 경륜으로 열린 혜안과 깊어진 사유를 바탕으로 자연과 인생을 포용하는 넉넉한 달관의 시편을 담았다. ‘봄에 푸른 풀을 밟으며 하는 산책’을 뜻하는 제목처럼, 시인은 풍류선객이 되어 새뜻한 기운이 생동하는 초록 생명의 숲을 거닐며 모든 생명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다. 표제시 「답청」을 비롯해 「숨은 꽃」, 「담쟁이」, 「뱀딸기」, 「당나귀와 함께」 등 총 76편의 시에 등장하는 무수한 식물, 동물 등은 목숨이 붙어 있어 그 자체로 삶과 사랑을 나누는 존재이다. 시인은 자신의 생활을 절제하면서 삼라만상과 이웃하여 사는 삶을 가지각색의 풍경들로 그려냈다. 단출한 안빈낙도 정신과 자연친화적 풍류가 어우러진 유종인 시조집은 현대인이 잃어버린 자연의 신비와 현대시가 놓쳐 버린 시조의 멋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선사할 것이다.
목차
자서 5
1부 겨울 당나귀에서 봄 당나귀에게로
서신 13
헌책방에서 14
겨울 당나귀에서
봄 당나귀에게로 15
가을 춘란 16
정자 17
연호를 지나다 18
두꺼비와 나비 19
간체자의 나날 20
종이컵 화단 21
파초芭의 내력 22
국립중앙도서관 23
히말라야 세탁소 25
뱀딸기 27
겨울 두꺼비 생각 29
당나귀와 함께 30
발품 31
충전 32
동행 33
머위쌈 34
빗자루들 35
밤의 반죽 36
춘니 37
죽은 고양이의 가을 38
도래샘 39
헛묘에 빗발이 치니 40
2부 한반도
겨울 선자 43
팔월 44
소낙비 45
새벽 눈 46
환상 동굴 47
몽타주 48
담쟁이 49
한식 50
뒤란을 읽다 51
숨은 꽃 52
귤 53
나도 고무신 54
나름 55
동숙의 노래 56
답청 57
먹자골목에서 59
나무빨래판 60
육교에서 61
도마를 말리다 62
풀밭의 신발 63
쥘부채를 펴다 64
연못이 있는 정자 65
겨울 우레 66
산역 67
한반도 68
이끼밭 69
3부 돌베개
가을 목내이 73
유년의 판화 74
족발과 난초 76
젖은 옷 77
겨울비 78
웃음을 건네받다 79
고운 시편 1 80
초겨울 81
산란 82
고욤나무 아래 83
지게차가 지나간다 84
돌베개 85
고운 시편 2 86
조롱박을 타다 87
비의 별사 88
에어 커튼 89
골칫거리 90
머리카락들 92
입적 93
꽃게와 놀다 94
술과 국수 95
매만지네 96
산밤 97
연기의 그림자 98
발문 초록생명의 숲으로 귀환한 어느 풍류선객의 근황 / 최창근 99
저자
유종인
출판사리뷰
초록 생명의 숲을 거닐며 만나는 숨탄것들의 풍경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추구해온 유종인 시인은 시조집《답청》에서 풍류선객이 되어 새뜻하고 소슬한 기운이 생동하는 초록 생명의 숲으로 귀환한다. 코로나 19와 기후 온난화로 전 지구적 위기를 맞은 이 시대, 시인은 창작의 본거지를 자연으로 삼고 독자가 생명의 기운을 만끽하며 자연과 교감할 수 있도록 이끈다.
맨발로 밟고 가자
바람을 밟고 가자 …
들판은 연둣빛 들판
돌아올 땐 초록 들판 …
지구에
또 사랑이 걸린다
짙어가자
마음이여
〈답청〉중에서
표제시〈답청〉을 비롯해〈숨은 꽃〉,〈담쟁이〉,〈뱀딸기〉,〈도래샘〉,〈춘니〉,〈이끼밭〉,〈당나귀와 함께〉 등 총 76편의 시는 시인의 마음에 들어온 자연의 풍경을 담고 있다. “나를 둘러싼 숨탄것(숨을 받은 생명체)들이 삼이웃(가까운 이웃) 같다”는 시인은 자연이 내는 기척과 기미에 오감을 열어 놓고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삼라만상을 완상하며 모든 생명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다.
때로는 사랑의 괴로움(〈겨울 우레〉)이나 뫼를 만드는 외로움(〈산역〉)과 같은 현실의 고통도 등장한다. 하지만 이는 시인에게 기다림을 가르쳤던 병든 아버지를 거쳐 한평생 기도했던 어머니의 죽음으로 이어져 역설적으로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헌책방에서〉, 〈히말라야 세탁소〉, 〈뒤란을 읽다〉)를 불러온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사라지지 않는 향기로 이 세상에 남기를 희구하는 간절한 사랑이 된다(〈귤〉).
우리 멋, 우리 가락으로 빚어내는 은은한 시조의 향기
자연 속에서 소박한 삶을 추구하는 유종인의 시심(詩心)은 단아한 시조의 옷을 입고 더욱 빛을 발한다. 시조(時調)는 고려 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우리나라 고유의 정형시로, 우리의 멋과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하는 문학 장르로 평가받으며 오랫동안 사랑받아 왔다.
유종인의 시조는 우선 간결하고 단출한 안빈낙도의 삶에 대한 희구가 스며 있다. “번다한 이 내 말들 언제쯤 간정해질까”(〈간체자의 나날〉), “진미는 세상에 주고 그늘 심심 달게 살자”(〈뱀딸기〉), “소란 적막이 한 몸이다”(〈소낙비〉) 등의 시구에서는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는 선비의 마음이 느껴진다.
최근의 한국 현대시에서 접하기 어려운 소슬한 우수(憂愁)의 분위기도 유종인 시조의 또 다른 매력이다. 가령 “벽이라는 그늘진 말 가만가만 매만져서/바람이 불어오면 푸르게 담 넘겨주며”(〈담쟁이〉)나 “몬존한 낮달 가까이 청처짐한 고욤 가지”(〈고욤나무 아래〉)와 같은 시구는 평범한 자연을 신비로운 수묵화처럼 아름답게 표현했다.
인간과 자연,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유종인의 시 세계
유종인 시인은 1996년〈문예중앙〉신인상을 받고 등단한 후, 2003년〈동아일보〉신춘문예 시조 부문에, 2011년〈조선일보〉신춘문예 미술평론 부문에 당선됐다. 지금까지 시조집 2권을 포함해 총 8권의 시집을 펴냈는데, 한 권 한 권마다 시인의 개성과 실험정신이 녹아 있다.
《아껴먹는 슬픔》(2001)은 고통과 상처의 이미지들로 그로테스크한 형상을 만들었고,《교우록》(2005)은 인간 사회와 자연을 서정의 문법으로 끌어안았다.《수수밭 전별기》(2007)는 세상을 슬픔의 언어로 보듬었고,《사랑이라는 재촉들》(2011)은 만물의 시선으로 만물의 의미를 탐구했다.《얼굴을 더듬다》(2012)는 나와 참 나를 성찰하며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세계를 품격 있는 시조로 그려냈다.《양철지붕을 사야겠다》(2015)는 유기적 세계를 사물들의 교향곡으로 표현했고,《숲시집》(2017)은 숲의 풍경과 그에 조응하는 인간 내면을 담았다.
유종인의 시 세계는 개인에서 자연으로, 죽음에서 삶으로, 분리에서 포용으로, 인식에서 행위로 나아가고 있다. 또한 시의 본령인 서정과 이미지, 운율의 실험을 통해 참신한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 변화의 귀결점이 바로 시조집《답청》이라 할 수 있다.